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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y 06. 2020

[수플레] 이젠 '깡'만으론 어렵습니다

ep.12 비 - 깡(GANG)



불우한 가정형편을 딛고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에 등극함에 이어 대한민국 대표 미녀와 결혼에까지 골, 시대의 풍운아가 있다. 반면, 영화계에선 흥행 참패의 새 역사를 열어젖히고 가요계에선 시대착오의 아이콘으로 대중들의 뭇매와 연민을 동시에 받는 한 안타까운 사내도 있다. 이러니하게도 그 둘은 동일인이다.


비. 본명 정지훈. 올해로 데뷔 19년 차인 그는 대한민국 연예계에 다시없을 인물이다. <안녕이란 말 대신> <I do>에서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상큼한 미소로 소녀팬들을 쓰러트리고, <태양을 피하는 방법> <Rainism>에서 우월한 피지컬을 앞세운 댄스 퍼포먼스로 젊은 여성팬들 덕질을 유발했으며, <상두야 학교 가자> <풀하우스>와 같은 드라마에서의 준수한 연기력으로 중/장년의 팬들까지 모두 사로잡 이른바 세대 대통합을 이뤄낸 반박 불가 최고의 남자 솔로 가수 겸 배우다. 어디 그뿐이었나. 안타까운 가정사를 딛고 자수성가한 연예인, 유노윤호는 귀여워 보일 정도의 열정킹, 할리우드 영화에 단독 주연으로 데뷔한 월드스타, 김태희 남편이자 김태희를 닮은 두 딸의 아버지 등등. 그의 인생은 성공 그 자체처럼 보다.


그런 그가 최근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마약을 한 것도 아니고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탈세/음주운전/성추행/고성방가/공연음란죄 등등 어떤 위법한 사실과도 무관하다. 그는 단지 늘 그렇듯 사력을 다해 연기를 하고 음반 활동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자전차왕 엄복동>부터 <깡GANG>까지, 그의 연이은 헛발질이 온라인 상에서 신랄하게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긴 말 필요 없이 먼저 영상부터 보자.


결말을 알면서도 클릭할 수 밖에 없는 썸네일


2017년 발매된 데뷔 15주년 기념 미니앨범에 수록된 노래 '깡GANG'. 다른 건 몰라도 이름값은 한다. 깡다구가 좋아도 너무 좋다. 2007년도 아니고 2017년에 이런 노래를 작사/작곡하고, 이런 안무를 짜고, 이런 퍼포먼스를 구성해 지상파 방송 뮤직 프로그램에 오를 수 있다니. 그가 비였기에 망정이지 혹 신인 가수였다면 매니저부터 소속사 대표까지 불려 나와 담당 피디에게 줄빠따를 맞았을 일이다. 정말이지 해도 너무했다. 총체적 난국이라 어디서부터 언급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대중들이 반복해서 꼬집는 이슈만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첫째, 방탄조끼와 레터링 모자에 대한 그이상하리만치 완고한 고집. 둘째, 문맥이나 감동은 모두 갖다 버리고 듣는 이를 질겁하게 만들 뿐인 가사. (그는 정녕 책을 안 읽는 걸까) 셋째, 유인원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럽고 해괴한 . 사실 뭐니뭐니해도 모든 문제의 근원비 본인의 '자기 객관화 실패'다.


자기 객관화.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 내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감각. 스스로에 대해 쉽게 합리화하지 않고 너무 관대해지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 그게 없다면, 모든 것―예컨대, 신이 내린 피지컬과 외모, 입지전적인 대스타의 후광 효과, 데뷔 20년 차 현역 댄스 가수라는 타이틀 등―을 갖춰도 이렇듯 패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객관화 실패'는 단언컨대, 실패 중의 실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실패들 중 가장 뼈아픈 실패다. 그 구렁텅이에서 혼자선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그 실패가 고착화되면 스스로의 틀린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독불장군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성공이 크고 화려할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두터울수록 그런 추태를 부리기 워진다.


그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대중들

얼마 전 유행하는 꼰대력 테스트 같은 걸 했는데 레벨 3이나 나왔다(최고 레벨 5). 그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뼈저린 말.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결국 속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내 안에 꼰대의 씨앗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다.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 지난날의 영광이 불어넣은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 틀려서는 안 된다는 자기 강박, 그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아집이 그를 여태 과거에 묶어두었을지도 모른다.


속 시원하게 말해보자. 비는 틀렸다. 지금뿐 아니라 2010년 언저리부터 계속 오답을 내고 있다. <LA SONG>도 틀렸고, 'UBD'도 틀렸고, <깡>, <차에 타봐>, <슈퍼맨> 등등 많은 결과물들이 정답에 근접하지도 못한 철저한 오답이다. 그의 옛 업적들이 꿈결같이 느껴질 정도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분명히 바로잡을 시간이 있었을 텐데. 분명 어떤 신호가, 어떤 방식으로든 경고음이 울렸을 텐데. 특히 이 지경까지 오도록 주위에선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건 별로인 거 같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라고, 소신발언을 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걸까. 작곡가는, 안무가는, 투자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악의 평범성에 이어 막장의 평범성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는 비가 불세출의 꼰대라거나 재기불능의 몰락 상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만천하에 공개된 그의 미숙함이나 부족한 면모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나는 그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기대가 된다. 팬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다른 대환장 망작을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 성적표를 허히 받아들이고 절치부심해서 돌아올 것인가. 


백 번 양보해서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최근 여러 번 틀렸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틀릴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자주 틀려도 되고, 때론 반복해서 틀릴 수도 있고, 가끔은 처절하게 틀려야 할 때도 있으니까.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면 몇 번 틀리는 게 무슨 상관이겠나. 나는 정지훈이라는 걸출한 엔터테이너가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벗어던지고 언젠가 자신에게 꼭 맞는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미래도 희망도 뭣도 보이지 않는 저 까만 가면 말고.


괴물 아니고요 베놈 아니고요


한편, <깡GANG>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는 2020년 5월 현재 692로, 유튜브에서 미친 속도로 역주행을 하 중증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염 단계는 이렇다. 처음엔 배꼽을 잡으며 박장대소하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복 재생하다가, 마침내 '1일 1깡'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깡의 덫'. 나도 오늘 청소기를 돌리는 와중 무심코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하고 흥얼거리고 말았다. 아차, 모든 건  의도였던 걸까? 내가 모르는 커다란 계획이 그에게는 있는 걸까? 그의 꾸러기 미소가 보이는 듯 정신이 아득해고, 오늘도 깡을 재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아, 안돼요 돼요 돼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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