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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May 13. 2020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ep.13 Si llego a basarte_Omara Portuond


안녕하세요, 5월의 두 번째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는 스페인 가수 'Omara Portuondo'의 'Si llego a basarte'라는 곡으로 찾아왔습니다. 작년에 히트를 쳤던 송혜교, 박보검 주연의 드라마 '남자 친구'에 삽입된 곡으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주인공들이 쿠바의 해변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듣는 장면에서 흘러나온 이 곡은 장면의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고 하네요.


https://youtu.be/s4feuF91rfA


이 곡을 부른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는 90세에 가까운 쿠바의 원로 국민 가수입니다. 그녀는 쿠바 재즈의 전설적인 그룹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유일한 여성 멤버입니다.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전성기에서 멀어진 쿠바 전통 재즈 음악을 되살리기 위해 1996년에 한 프로듀서와 레코드사가 한 때 쿠바 음악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노인 연주자들을 한 데 모아 만든 그룹이에요. 6일 만에 라이브로 녹음을 끝냈지만 출시와 동시에 600만 장 이상을 판매하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곡 'Si llego a basarte(네게 키스하게 된다면)'은 그들이 2004년에 발매한 앨범에 수록된 곡입니다.





쿠바는 오래전부터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였습니다. 남미 국가 중에서는 치안이 안전한 편이고 최근 드라마와 예능에서 쿠바가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국내 여행인들에게 점차 사랑받는 여행지가 되고 있지만 오랜 비행시간과 남미라는 특성상 쉽게 여행을 결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전환점을 맞게 되는 시기에 혼자 훌쩍 떠나고픈 곳입니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혼자 여행할 용기가 점점 사라질 것 같으니 더 용기를 잃기 전에, 가능한 빠른 시기예요.

마침 뜻이 맞는 동생이 있어 올해 말 즈음에 함께 쿠바를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 년 간 돈도 모으고 휴가도 모아서 10일 정도 짧고 굵게 다녀오자는 계획이었어요. 둘이 만나면 종종 'Si llego a basarte'를 들으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쿠바의 해변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해변에 앉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재즈 음악을 듣고 있었어요. 일 년간의 달리기를 잠시 쉬는 시간을 만끽하면서.

물론 그 계획은 지금 기약 없이 미뤄져 버렸습니다. 당장 돈이 생기고 한 달의 휴가가 생겨도 쿠바로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멈춰져 버린 상황이니까요.





바이러스가 국민들의 삶을 멈춰놓은지 세 달째를 향해 시간은 야속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 모두가 힘을 합쳐 바이러스를 이겨낸 것 같은 영화 같은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두 달 넘는 시간은 몸과 정신이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다시 잘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딛고 일어서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게 잘해보자 다짐했던 날 마주한 깜깜한 소식들에 개인적인 일까지 파도처럼 밀려들자 너무 두려워서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모든 게 깜깜하고 막막하게 느껴졌어요.


그날 느낀 두려움은 막연히 또다시 시작될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이나 내 주머니의 사정, 일의 부재 등에 의한 게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두렵게 만들었던 건 이대로 주저앉아서 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질 것만 같은 무기력함이었습니다. 에러난 컴퓨터를 재부팅하듯이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다시 깨끗하게 새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이고 하루 자고 일어난다 해도 어느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두려워하고 겁내고만 있다가 올 해를 다 흘려보낼 셈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원래 이렇게 겁쟁이였나 자문하는 사이 누군가가 제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겁쟁이들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원시인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당시 모험심이 강하고 겁이 없어 앞에 나서는 사람들은 먼저 죽을 확률이 높았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저 바다 건너 뭐가 있을까 하고 헤엄쳐 가다가 죽고 산 너머에 뭐가 있을까 하고 넘어가다 짐승이나 다른 부족에게 공격당해 죽었을 거라는 거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에 비해 다들 겁쟁이였고 그 후손인 우리들 역시 모험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겁쟁이일 수밖에 없을 거란 이야기가 떠오르자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위로가 되더라고요.






얼마 전 현실판 히어로물 찍으신 정우님


이미 올해의 절반 가까운 시간이 손도 못쓴 채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버렸고 촬영 도중 제작이 멈춰버려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영화처럼 남은 올 해도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어느 날 폭탄 상자 하나만으로 백두산 폭발이라는 대재앙을 막아내던 히어로가 현실에서 등장해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구해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요. 반대로 영화처럼 검은색 화면으로 페이드 아웃되고 '3년 후'라는 자막이 입혀진 뒤 다시 밝아진 화면에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이전의 내가 '나에게 나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거든요.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내 손으로 바꿀 수 있고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면 이제는 '그래도 일어나면 어떻게 할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라고 이야기하는 인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미래의 나를 믿고 정신 승리를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내년에 고난을 다 이겨내고 보다 더 단단해져 있을 거란 사실을 믿고 묵묵히 뭐라도 꾸준히 하고 있어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자기 계발이나 커리어를 위한 것뿐 아니라 인생을 재미있게 살기 위한 것들도요. 내년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왜 그때 한심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풀 죽어 있었니. 아까운 시간들, 뭐라도 해보지 않고.'라고 야단칠 수 없게요.







오늘 아침의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이 곡이 걸려들었습니다. 여전히 쿠바는 너무나 멀리에 있지만 흘러나오는 전주에서부터 이미 저는 노을이 내려앉은 보랏빛의 쿠바 해변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어요.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희망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듯합니다.


곧 지하철이 도착하겠다는 알림이 들려오고 플랫폼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정신없이 흐트러트렸습니다. 지하철에 올라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흰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눈으로만 인사를 하네요. 잘 지내냐고 조금만 더 버텨보지 않겠냐고 힘내라고 마치 서로가 그렇게 인사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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