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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Sep 27. 2020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못 쓰는가

<심심과 열심>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땐 글을 딱 백 편까지만 발행하기로 막연히 다짐했. 백 편의 글을 다 쓰고 나면 글쓰기 실력이 일취월장할까 싶어서? 그런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창한 숫자를 앞에 내세우고 뒤에 숨어 요행 노리 위이었다. 백 편이나 쓰다 보면 누군가 알아봐 주겠지. 운이 좋으면 도중에 세간의 이목을 끌 수도 있겠지. 그러다 보면 차세대 브런치 신을 주름잡을 젊은 작가로 지목받을지도 몰라. 졸지에 출간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이처럼 근거라고는 없는 얄팍한 꿈을, 100이라는 커다란 숫자에 기대어 꿨다. 동시에 그 숫자는 내게 어떤 금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 금을 밟을 때까지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재능이 없는 거야.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그만둬. 백 편을 다 완성한 뒤의 나에게 보내는 충고였다. 이제 어느새 80편이 넘었는데 주목은 고사하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남아있는 스무 번 남짓의 카드를 다 소진하면 나는 결국 스스로의 약속대로 쓸쓸히 돌아서야 할까.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이런 내 고민에 응답을 해 주는 책이 있었다. 김신회 작가의 <심심과 열심>이라는 에세이다. 여태껏 글을 쓰면서 혼자 곱씹었던 물음들에 대한 그의 대답이 전부 나와 있었다. 마치 나 보라고 만든 책인 듯 했다. 이글쓰기의 방향을 일러주는 참고서가 아니다. 13년째 글로 밥 벌어먹는 작가 역시 막막함 속에서 글을 낳는다는 걸 고백한 일종의 '푸념 모음집'이다. (그래서 더 좋았다) 또 뻔한 에세이야, 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단숨에 무장해제되고 어느새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박수를 쳐 가며 읽고 있었다.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충분했다. 간혹 취미로 끄적이는 내 처지가 열세 권이나 책을 낸 그의 처지와 같을 리 없건만, 책을 덮고 나서는 뭔가 용기 비스무리한 감정까지 들기도 했다.




글 쓰는 일만큼은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자꾸 나에게 그만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만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즘 누가 책을 봐.', '앞으로도 책은 아닌 것 같아.', '글 써서 뭐 먹고 살 거니?'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도 계속하고 싶다고 고집부리면서도 점점 혼자 책을 짝사랑하는, 혼자만 글쓰기에 집착하는 스토커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중략) 몇 달 후, 완성한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내고 나서 책상에 엎드려 한참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막 눈물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책을 마지막으로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는데, 이 일은 또 나를 안 좋아하겠지. 이 책은 또 안 팔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엉엉 울었다.

생각만큼 글이 잘 안 써질 때 나는 물 먹은 솜처럼 눅눅해졌다. 단순히 노트북 앞에서뿐만 아니라 한 주의 기분이 글 작업에 좌우되는 날들도 있었다. 글 쓰는 일이 내 본업이 아니고, 내가 가진 취미도 글쓰기 하나가 아닌데, 유독 글 앞에서만 연약해지곤 했다. 대체 글쓰기가 뭐길래. 저 작가나 나나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고백하자면 나는 노상 불안했다. 조회수가 바닥을 기면 내 글이 구린가 싶어 불안하고 조회수가 갑자기 늘면 원인을 알 수 없어 불안하고 구독자가 생기면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것 같은 압박에 불안하고 글이 브런치 메인에 노출되면, 아 아직 그런 적은 없다. 모르긴 몰라도 메인에 걸리면 아마 5초 정도 뛸 듯이 기뻐하다가 금세 안절부절못하게 될 것이다.


글에 대한 칭찬이나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와도 문제였다. 기분이 들뜨는 건 순간일 뿐 조바심이 났다. 더 잘 써야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지. 더 간결한 표현, 더 유려한 문장을 구사해야지. 알맹이가 꽉 들어찬 글, 메시지가 가득한 글을 써야지. 더 잘 쓰고자 하는 욕심이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 어느 글은 뜬금없이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마무리되고 어느 날은 모든 걸 통달한 현자인 척하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즐겁게 쓰는 자에서 무겁게 쓰는 자가 되었다.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진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인간관계와 비슷하다. 만날 때마다 교훈적 이야기만 하고,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삶이란 얼마나 신비롭고 위대한지 찬양하는 사람하고는 1년에 한 번 만나도 충분히 부대낀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 갑자기 든 생각, 요새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나 열 받게 만든 사건들을 두서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과는 매일 만나도 할 이야기가 생긴다. 인간관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교훈이나 깨달음이 아닌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다. 그 쓸모없음이 바로 쓸모인 것이다.

이 꼭지를 읽으며 많이 찔렸다. 나는 처음 글쓰기 여정을 출발하던 해맑던 그 마음과 얼마나 멀어졌는가. 담백과 간결과 솔직함은 나에게서 얼마나 옅어졌는가. 자의식은 얼마나 과잉되고 오버는 또 얼마나 늘었는가. 무언가를 꼭 담아내려고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무용한 이야기여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과감히 해야지. 내 글에서 내가 담아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건 결국 내가 가진 본연의 이야기뿐이라는 사실.




그러고 보면 글쓰기 역시 편지를 쓰는 일이다. 우리가 쓰는 글은 누군가를 향한 편지이며, 마음을 보여 주는 도구다. 그래서 글쓰기에 대해 조언할 때 자주 이 말을 한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심정으로 글을 써 보세요.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더 많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어요." 나 역시 누군가에게 편지 쓰듯 글을 쓰는데, 정작 그 글은 나를 향한 편지일 때가 더 많다.

나는 요즘도 일기를 쓴다. 일기라고 해봤자 대단한 건 아니고 주로 그 날 있었던 일과 간단한 소회를 적는 게 다다. (쓸 말이 없는 날은 건너뛰기도 한다) 보통 짧게 두 줄 정도 적지만 가끔 잡생각을 풀어헤치는 날엔 반 페이지를 넘기기도 한다. 그렇게 쓴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엔 말뚝을 박기 위함이었다. 올해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저런 행동을 했어, 증거를 남길 요량으로 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 비교해볼 수 있을 테니까. 지난해에 나는 여기에 있었는데 올해는 이만큼이나 왔네, 부쩍 자라 있을 나를 상상하며 설레곤 했다. 그땐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시간이 지나면 응당 발전해 있을 거라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웬걸. 그건 심각한 오판이었다. 일기장은 쌓여가는데 성장은커녕 놀라우리만큼 지난날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인간관계도, 연애 패턴도, 자질구레한 습관들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영광도 과오도 거기서 거기였다. 말뚝은 비슷한 자리 언저리에 빼곡히 쌓일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뚝을 박는 의식을 아예 포기한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오늘의 말뚝을 지금 여기에 쾅쾅 두드려 넣는다. 여기서부터 전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 사실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삶은 꼭 선분 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말뚝의 존재 이유는 비교가 아니라 반추에 있는 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부터는 그냥 쓸 말이 있을 때 설렁설렁 쓰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일기장 열 권을 채웠다. 비결이자 원칙이 있다면 억지로 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상 억지로 쓰지 않은 글, 지나가다 툭툭 던지듯 기록해둔 말들이야말로 다시 볼 때 더 큰 울림이 있다. 가끔은 놀랄 때도 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꽤 제법인걸. (물론 높은 확률로 오그라들 수 있다. 이 꼭지를 쓰는 와중 슬쩍 지난 일기장들을 꺼내 봤는데 살짝 토할 뻔했다. 웩.)


본질적으로 내 글은 일기와 다르지 않으니 아마 같은 원칙이 작동할 것이다. 거기에 더 추가하자면,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기. 곧고 우람한 말뚝만 내보이려고 애쓰지 않기. 그리고 작가의 말마따나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쓰기. 지나가는 사람이 들춰볼 수 있고 내 주변 사람이 몰래 엿볼 수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미래의 나를 향해서 쓰기. 이 글에 일부러 들리는 미래의 나는 아마 또 지금처럼 생각이 많아서 힘들어하는 와중일 게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의 말뚝 근처에 묻어놓을 편지는 이런 내용이다.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마. 그냥 써.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마. 그냥 살아.'



(2020.09.27)



글 백 편을 달성하면 멋지게 떠나려고 했는데, (듣보잡에게) 화려한 퇴장의 무대는 주어지지 않으니 아마 계속 써야 할 모양입니다. 어느새 글쓰기가 습관이 되고 또 즐거워지고 있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시고 또 기다려주시기까지 하는 200명의 구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오늘도 다시 한번 새기는 마음의 주문. 널리 알려지기보다는 깊게 신뢰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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