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쇼핑에 푹 빠져 있다. 저번 주엔평소에 눈여겨보던 청바지가 세일을 하길래 냉큼 질렀다. 무려 설날 세일! 마지막 남은 사이즈! 사실 약간 작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켰다. 입다 보면 늘어나겠지 뭐.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배송을 기다렸다. 출고부터 집하까지 착착 진행되어 아주 뿌듯했다. 언넝 우리 집으로 오렴 아가야.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오늘 오후에 배송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현관 근처를 아무리 뒤져봐도 택배가 없다. 찜찜한 마음이 들어 택배 기사님께 문자를 보냈다.
옥뮤다 삼각지대에 빠진 줄..
문 앞에 있어야 할 택배가 없다는 내 연락에 그에게 곧장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주 퉁명스러운 말투다. 죄송하다고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지금은 일로 한창 고될 시간이겠지. 애타는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차분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대뜸 에휴- 하며 한숨을 푹 쉰다. 요컨대 쇼핑몰 측에서 우리 아파트와 이름이 비슷한 아파트로 주소를 잘못 기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런 일이 잦은 모양이다. 오히려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처리할 일이 늘어 굉장히 짜증 난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내일 출근하는 대로 회수해서 연락 주겠다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 혼자 속을 끓였다. 내일부터 3일간 집을 떠날 일정이 있어 오늘 내로 수령해야 하는데. 오늘 받지 못하면 혹여 교환이나 환불이 어려울 수도 있는데. 참다못해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어제 그 문제의 택배 주인인데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으시냐고. 분주하게 바코드 찍는 소음 사이로 그의 대답이 들려온다. 일이 너무 많아 아직 그 단지까지 가려면 멀었다고. 밤 10시는 되어야 회수하러 갈 수 있다고. 여전히 힘들고 귀찮은 듯한 투다. 나는 내일 출장 일정이 있어 기다릴 수 없으니 오배송된 주소로 직접 가서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는 '번거로우신데 괜찮으시겠어요?' 하더니 냉큼 주소를 읊는다. 수화기 너머로 화색이 도는 듯하다.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105동 1204호란다. 잉? 우리 집 주소는 107동 1202혼데.
wait.. what?
강추위를 뚫고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의 다른 아파트를 찾아가는데, 곱씹어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 기사님이 잘못 배송한 그 아파트 단지는 105동까지밖에 없고 나는 107동에 사는데. 아파트 이름이 헷갈렸다 쳐도 다른 동에 배송을 한 건 뭐지. (심지어 호수도 다른 호수로 배송했다) 귀찮아서 아예 다른 주소에 택배를 던지고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쇼핑몰 측의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잘못한 것도 맞잖아. 본인의 책임이 분명한데도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일관한 거지. 어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은 거지. 나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철저히 피해자일 뿐인데. 친절하게 굴면 호구로 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인가. 아, 억울해. 다시 전화해서 따질까, 택배 회사에 민원을 넣을까,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고민하던 도중 최근 읽은 책이 떠올랐다.
'품위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책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저자는 품위란 "본능이나 감정 등의 인간 고유의 '기본 설정 값'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본능이나 즉흥적 감정, 안락함과 게으름 그리고 영혼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이다. 다시 말해 '기본 설정 값'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를 발견하려면 자신 안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은 바로 이 이성적 판단에 있다.
그렇다. 내 택배 어디 있냐고 벌컥 화를 내기는 쉽다.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를 요구하거나 민원을 접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마따나 아주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10분 전의 나 포함)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깐만 시간을 내서 그의 상황에 대해 상상해보자. 얼마 전 설 연휴가 있었고, 더 전에는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문제로 커다란 이슈가 있었다. 그는 지금 과도한 업무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을 것이 분명하다. 혹시 또 모른다. 그가 지난주에도 비슷한 일로 고객에게 폭언을 들었을지도. 자기는 억울한데도 사측으로부터 커다란 불이익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사람보다 택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들에 대해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거기에 개인적인 불행이 더해졌다면 어떨까. 그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아들이거나 암 환자인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일 수도 있다. 타인을 향한 배려는 여유에서 나오고, 여유는 곧 기력과 같은 것이다. 그에겐 아마 기력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아, 더 이상의 상상은 그만두자. 민원을 넣으려던 내가 너무 작아진다. 신기하게도 들끓던 분노는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렴 어떤가.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걸.
택배 사건의 마무리를 짓자면 이렇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배송된 주소에 살고 계신 먼 이웃(?)은 아주 친절한 분이셨다. 분실할지도 모르니 본인이 물건을 맡아주겠다고 먼저 제안하셨을 뿐 아니라 야근 후 늦은 시간에 찾아간 민폐를 흔쾌히 이해해주시기도 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넉넉했다. 한파를 뚫고 먼 길을 찾아간 보람이 있었달까. 다만 아쉽게도 청바지는 너무 타이트해서 곧바로 반품 요청을 했다. (흑흑.) 그러면서 배송지를 더 자세하게 고쳐 적었고 말이다. 이제 다른 아파트를 담당하는 그 택배 기사님과 나는 아마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미심쩍은 부분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과로와 폭언에 시달리지 않기를. 덕분에 내가 많이 배웠으니.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문구다. 나는 이 문장이 바로 품위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짐했다. 아무리 내 싸움이 지겹고 고단하더라도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기로. 감정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상대의 조용하지만 치열할 분투를 상상해보기로. 그리고 한 가지 더. 세일이라거나 마지막 수량이라고 해서 냅다 지르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