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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이 무려 6년 전부터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는 이번 영화 <테넷>. 보고 온 지는 꽤 됐지만 이제야 후기를 남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렵긴 어렵다. 시간의 흐름이 여러 번 꼬이는 탓에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만약 몇 번의 관람으로도 이해가 어렵다면 유투버들의 설명을 참고하자. 당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놀란이 놀란한 것뿐이다.) 나는 두 번 봤다. IMAX로 한 번, 일반으로 한 번. 아직 상영 중인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있다면 IMAX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한 사람의 상상력이 세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어디까지 강력해질 수 있는지 당신도 느끼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이 글에서는 엔트로피니 시간 역행이니 하는 영화의 복잡한 이론은 넣어두고 감상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이해 못했다는 뜻은 아님. 아무튼 아님.
1. CG를 쓰지 않는 감독의 고집
영화 초반부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테러 신이 등장한다. 놀라운 건 그 폭파 장면이 진짜라는 사실. 이밖에도 비행기 충돌 장면이나 자동차 추격전, 대규모 전투 등의 화려한 볼거리 모두 실제로 찍었다고 한다. 건물에 충돌하는 비행기 역시 진짜 건물과 진짜 보잉 747 비행기고,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 신 역시 프로 드라이버가 100km/h의 속도로 거꾸로 달렸다! 참고로 <테넷>에 사용된 CG는 300 쇼트 미만이라고 하는데, 이는 평범한 영화에 비해서도 한참 적은 수준이라고 한다. 똑같은 신을 여러 번 찍어서 되감기 할지언정 그린 스크린은 사용하지 않았던 고집, 한 장면의 리얼리티를 위해 비행기를 덥석 사버리는 똘끼는 뭐랄까, 찬란하기까지 하다.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진짜가 아닌 건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고. 열정과 집착이 이 정도는 돼야 거장이지. 암.
2. 사토르와 타노스, 닮은 듯 아닌 듯
사토르를 보고 아마 많은 분들이 마블의 역대급 빌런 타노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생명체의 과도한 증식이 우주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그 수를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타노스와, 황폐해지는 미래를 막기 위해 엔트로피의 방향 자체를 거꾸로 돌리려는 사토르는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어마무시한 환경충이다) 사토르가 훨씬 비겁한 악당이란 점만 빼고. 적어도 타노스는 핑거스냅을 할 때 소멸하느냐 생존하느냐 50% 확률에 자신의 목숨 역시 걸었다. 반면 사토르 이 자식은 어차피 본인이 지병으로 죽을 예정이니까 죽는 김에 인류의 심판자나 해볼까나~ 하는 느낌이다. 그에게 정말 미래의 환경 이슈가 중요했을까? 과연 그는 자기가 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그는 그냥 선민의식에 찌든 관종 악당에 불과하다. 게다가 삐뚤어진 소유욕까지 탑재했다. 아내 캣을 위협하면서 했던 그의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그럴 수 없어(If I can't have you, no one can)" 여기서 메모, 선민의식과 소유욕이 결합할 땐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수도 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악당에게도 적절한 서사를 부여하는 것이 (선악 대립이 명확한) 히어로물의 과제인 듯하다. 그리고 전 지구적/범우주적 빌런을 그려낼 때에는 환경 이슈만한 것이 없다. 크고 작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현대인 대부분은 환경오염의 주범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니까. 다만 이번 영화에서는 개연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굳이 사토르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을까. 글쎄, 험상궂은 외모―괴팍한 인성―무자비한 폭력성으로 이어지는 '빌런의 삼위일체'를 이룬 악당에겐 공감의 여지 따윈 필요 없다.
3. 닐, 닐, 또 닐...
영화를 두 번 본 것은 오로지 닐 때문이었다. 닐과 주인공의 마지막 대화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서. 최종 임무 완수 후,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걸 직감한 닐. 어렵게 획득한 알고리즘을 주인공에게 맡기고 멋지게 뒤돌아선다. 나에겐 여기가 끝이지만 너에겐 여기가 시작이라며, 둘 인연의 시작점에서 다시 만나자는 멋진 말을 남기고서. 쿨내와 짠내 범벅의 뒷모습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그제야 모든 걸 깨닫게 된 주인공의 빨간 눈동자. 개인적으로 <라라랜드> 급의 엔딩 충격이었다. '닐'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의 풋풋한 남성미는 덤.
희끄무레하고 낭창낭창한 뱀파이어는 잊어라. 그의 인생캐는 현 시간부로 '닐'이다누군가의 분석에 따르면 영화 속 어떤 순간 닐은 세계에 열몇 명이 존재한다고 한다. 순행의 닐, 역행의 닐, 역행 후 순행하는 닐, 다시 한번 더 역행하는 닐... 그는 테넷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주인공을 구해준 요원도, 최종 임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요원도 역시 그였다. 여기서 내가 꽂힌 부분. 인버전은 시간 여행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1년 전의 과거로 가려면 역행 후 1년을 똑같이 보내야 한다. 게다가 외부에 노출된 채로 있을 순 없기에 필연적으로 어딘가에 갇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예를 들면 컨테이너나 크루즈 같은 단절된 공간에. 미래에 세워질 '테넷' 결사대의 요원이었을 닐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역행 속에 있었을까. 지루하게 또 묵묵하게, 오로지 하나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
자 이제 마무리. '아는 것이 힘이다 Knowledge is power'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오래된 명제가 있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어 왔다. 단 하나,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서만 빼고. 암만 아는 게 힘이라지만 '미래'의 영역에서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무력하다. 점성술부터 천체물리학까지, 사주팔자에서 양자역학까지 학문은 진화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결과는 똑같다. 그래서일까. 놀란은 영화 속에서 이를 살짝 비틀어 이렇게 말한다. '무지가 우리의 무기다 Ignorance is our ammunition.'
언뜻 베이컨의 격언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 같은 이 대사는, 찬찬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요는 이렇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알 수 없으니, 그것을 손에 쥐려고 애면글면하지 말 것. 그저 현재의 직관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답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베이컨과 놀란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알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알려고 하되 알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놔둔다면. (힘과 무기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가? 생각해보면 시간 여행을 다루는 창작물이 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과거를 바꾸기보단 일상의 소중함에 눈뜨라는 교훈을 주고,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선 결말을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의 다른 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는 이런 직접적인 서술도 나온다. 나는 이 이야기들이 모두 조금씩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미래나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테넷>을 관통하는 이 한 마디도 다르게 읽힌다. 예고편에서도 사용되었고 관람평에서도 주로 언급되는 영화 한 줄 요약.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 Don't try to understand it. Feel it.' 비단 영화의 난이도 때문에 나온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