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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퇴사자는 다 어디서 왔을까

<평균의 종말>

by core


한 브런치 작가님의 적극 추천으로 덜컥 사게 된 책 <평균의 종말>. 긴 말 필요 없고 이건 여러분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시험과 면접으로 뒤덮인 평가 지옥의 사회에 신물이 난다면 더더욱. 책 내용 중 밑줄 친 부분을 공유한다.


19세기에 도입된 평균주의는 본래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다. "어떤 값을 측정할 때는 오차를 줄이기 위해 반복 측정 후 평균값을 채택한다. 인간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어떨까?" 그렇게 인간이란 전체 종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서 '평균'이 도입되었다. 개체의 여러 특질―신장, 체격, 지능, 결혼 연령, 사회적 능력 등―의 평균값을 바탕으로 인간 종의 '정상 상태'를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상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비정상도 있는 법. 평균을 중심으로 우/열등을 가름하게 되면서 평균주의는 엘리트주의로 진화하고, 비로소 무한경쟁시대가 열리게 된다. 교육기관은 인간의 능력을 계량할 수 있는 객관적(인 듯 보이는) 평가 도구를 만들어냈고, 그에 힘입어 기업과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균적 인간이라면' 누가 됐든 적절히 기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산업혁명 시대의 증기기관이 그랬던 것처럼 평균주의는 사회에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다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폐해도 크다. 21세기 현재, 효율의 이름 아래 각자의 개성은 거세되었고 시스템 만능주의 속에서 자아실현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평균주의에 개인의 영혼을 저당 잡힌 대가다. 매일을 공부와 시험에 짓눌려 살아가는 학생들과 숨 쉬듯 퇴사를 부르짖는 직장인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세대는 평균주의라는 증기기관차의 불완전연소 결과물이다.

새까맣게 뿜어져 나오는 수능 세대의 영혼이 보이시는가


저자는 주장한다. 이제는 평균주의를 탈피하고 '개개인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그 근거로 인간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1. 들쭉날쭉의 원칙

우리가 간과된 재능을 알아본 것이라 해도 그 재능은 특이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재능이라고. 그동안 쭉 있어왔고, 들쭉날쭉한 특성을 가진 인간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재능이라고. 따라서 진짜 난제는 재능을 구별할 새로운 방법 찾기가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게 시야를 방해하는 일차원적 눈가리개를 제거하는 일이다. p143

세상에 평균적인 인간은 없다. 누구는 팔이 길고 다리가 짧고, 누구는 허리가 길고 목이 짧다. 누구는 수학을 잘하는 대신 사교성이 부족하고, 누구는 언어 습득엔 자신 있지만 추리 게임에는 영 쥐약일 수 있다. 평균과의 거리나 주제별 편차가 누가 누구에 비해 낫다거나 덜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리고 누구의 평균 점수가 누군가의 평균적인 능력을 담보해줄 수 없다. 전교 1등은 그냥 '공부'를 잘하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2. 맥락의 원칙

우리를 일련의 특성에 따라 평가하는 검사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성격에 대한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그런 특성들을 알면 그 사람의 '진짜' 정체성을 꿰뚫을 수 있다는 우리의 뿌리 깊은 확신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p151

MBTI가 유행이다. 인간의 유형을 분류하여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는 좋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규정짓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행동하는 존재다. 언뜻 모순되게 비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주변의 평판이 갈린다면, 그건 그가 다중인격자여서가 아니라 그를 파악한 맥락이 서로 달랐기 때문일 테다. 예를 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예의 없는 인간들 앞에서는 지구 최강의 싹퉁바가지가 된다. 오늘은 옆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낮술 아저씨들을 만나 테이블 뒤집어엎고 싸울 뻔했다. 아직도 화난다. 아오 빡쳐.


3. 경로의 원칙

경로의 원칙은 다음의 2가지 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첫 번째,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는, 그리고 그 어떤 특정 목표를 위한 여정 역시도 똑같은 결과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은 저마다 동등한 가치를 갖고 있다. 두 번째,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경로는 당신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결정된다. p.190

나는 항상 고민이었다. 내가 가려는 길 위엔 왜 아무도 없지. 앞서서 이끌어주는 사람도,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의 조언도 내게는 잘 맞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경로의 법칙>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가는 길에는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름길을 안내할 길잡이도, 당신의 행낭을 대신 이고 갈 셰르파도 없다.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다. 뭐야, 다들 그런 거였어? 나만 혼자인 줄 알고 잔뜩 쫄았네.





내친김에 얘기를 더 해보자. 우리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평균주의에 대해. 특히 평가 중심의 엘리트주의 교육에 대해. 내가 그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꾸역꾸역 맨 앞줄까지 가 봤으므로 더더욱 확신할 수 있다. 그건 틀렸다. 등급과 유형으로는 인간을 요약할 수 없. 사람은 결코 숫자로 대체될 수 없다.


어찌 보면 나는 그 체제의 수혜자다. (아주 우연히도) 공부가 나에겐 가장 쉬운 일이었으므로. 만약 주요 과목이 국영수가 아니었다면 결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일례로, 나는 가끔 축구를 하면서 절망한다. 이만큼 좋아하고 열심히도 하는데 이렇게까지 늘지 않는 걸 보면 신기할 정도다. 만약 학업 성취도 평가의 지표가 축구 실력이었다면 아마 나는 중간 언저리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축구를 꾸준히 좋아했을 리도 없겠다. 그 지표가 가창력이나 유연성이나 내가 유독 취약한 종류의 것이었다면 나는 분명 바닥만 맴돌았을 것이다. 낙제점을 받아들고선 나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회에 분개했을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성과를 내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그런 자신에게 믿음을 되찾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재수 없진 않았음

평균주의는 성취하지 못한 자에게 패배감을 심어준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성취한 자에게 그릇된 신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나는 이제껏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내 노력 덕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나는 그만큼 열심히 했으니까. 그런 내게 '노력하면, 성취한다'는 당연히 참인 명제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나는 (이제야) 안다. 세상엔 운과 확률을 배제한 그 어떤 당연도 없다. 내가 지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꽤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게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조차 운의 영역이다. 물론 모든 것이 운 때문이라는 뜻은 아니지만―그렇다면 내 지난 노력들에게 너무 미안해진다―대체로 그렇다. 노력의 순도와 실체적 성취 사이 연결고리는 생각보다 느슨하다. 종자가 아무리 좋아도 마룻바닥에 뱉은 수박씨에서 수박이 열리긴 어렵고, 종자가 아무리 불량해도 양지에서 정성껏 가꾸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엘리트주의 타파가 여전히 어려운 이유는 아직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참고로 앞서 말한 명제의 대우 명제를 생각해보자. '성취하지 못하면, 노력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 참일 수는 없다. 참이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성공하는 방법, 돈을 버는 방법이 다원화되고 있다 점에서 특히 그렇다. 유튜브 열풍에 힘입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경제활동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직업 경계가 모호해졌다. 더 나아가 전문성을 인정받는 요건 자체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유튜브 골드 버튼을 생각해보라) 이제 과거의 모델을 답습한다고 해도 과거와 동일한 정도의 부와 명예를 보장받지 못한다. 비로소 등급제와 학벌로 대표되는 평균주의의 굳건한 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굉장히 반갑다. 비록 십 수년을 엘리트주의에 열심히 부역해, 한 마디로 고점에서 물린 입장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기꺼이 존버를 청산하고 손절할 의향이 있다.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만 있다면. 개인의 출혈은 감수해야지 어쩌겠나. 진통 없는 출산은 없는 법인데. 그저 나는 퍼스널 브랜딩의 시대, 정해진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의 분야인 시대가 온다는 사실이 마냥 설렌다. 아, 좀만 늦게 태어날 걸.




과수를 재배할 때 '솎아주기' 단계가 있다.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될성부른 녀석들 몇 놈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한된 토양 내 양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그렇게 소수의 고품질 과실을 산출해내는 것이 최대 목표다. 그렇게 우리는 일찍부터 무고한 가능성들을 털어내도록 교육받아왔다. 그래야만 더 달고 맛있는 과일이 열릴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에 의해.

예송논쟁 급 빅뱅 (이미지 출처 : UPI뉴스)

겨우겨우 과일을 생산해내도 문제다. 개개인성을 고려하지 않는 평가 기준 때문이다. 각기 다른 과일들인데 똑같은 항목으로 종합 순위를 매기는 꼴이다. 포도 미만 잡의 당도 기준에서 새콤한 레몬은 갈 길을 잃고, 수박 미만 잡의 크기 등급에서 싱그러운 딸기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런 단차원적 사회에서는 딱복이니 물복이니 하는 논의 자체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급진주의 물복수호연대다) 물론 평균의 종말이 온다고 해서 마법처럼 유토피아가 올 거란 기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여름부터 땅에 나뒹구는 풋열매들이나 상큼한 게 매력인데 달지 않다고 폄하당하는 이들이 이제는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나는 실제로도 상큼한 게 매력이다. 구독자님들만 알고 계시라.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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