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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사랑 고백

<어떤 양형 이유> <살고 싶다는 농담>

by core


나는 유약한 사람을 좋아한다. 융통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사려 깊은 사람. 조금 어리숙해 보일지라도 진심 앞에서는 늘 벌벌 떠는 사람. 남의 입장이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천성적으로 불가능한 사람. 그렇다고 금치산자 수준의 답답이를 말하는 건 아니고요. 여하튼 마음이 여린 사람이 좋다. 그런 이들은 직업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빛난다. 드물지만 사회적으로 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런 심성을 간직한 이가 있었다. <어떤 양형 이유>의 저자, 판사 박주영이다.


놀라웠다. 사랑과 정의, 아직도 그런 뜨뜻미지근한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 법복을 입고 서릿발 같은 정의를 휘두르면서도 가슴엔 연약한 심장을 간직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가. 각종 경범죄부터 흉악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죄자들을 매일 만나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아닌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뇌로 혼수상태에 가까운 그의 일상을 만났다.

p.9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판사라서 행복한데, 왜 이럴까? 판사 생활이 길어지며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행복의 총량 대신 불면과 악몽의 나날이 늘었다. 불면은 두통과 소화불량이 되고, 소화불량은 미란성 위염이 되고, 급기야 이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법원은 물론 나에 대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도 신경 쓰지 않는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안 사실이지만 나를 힘들게 한 건, 리메이크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를 미치게 한 아이의 환영과 정확히 일치했다. 국민의 신뢰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내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지만, 재판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빛은 고스란히 누적되어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소년재판을 할 때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 소년원으로 가며 울부짖던 눈빛, 전 재산을 사기당한 피해자의 눈빛, 성폭행 피해 여성의 분노와 수치심 가득한 눈빛, 꽃 같은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빛, 퇴근해서 집으로 오지 않고 영정사진 속으로 가버린 아빠의 눈빛, 눈빛... 그 눈빛들은 <매드 맥스>의 아이처럼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들은 집요하게 따졌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법과 법감정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는 판사이자, 스스로가 틀렸을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는 남자. 어렵게 어렵게 망치를 세 번 두드린 뒤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을 어떤 유약한 중년의 그림자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는 이 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법이란 응당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설교하지도, 또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타이르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그의 돋보기 안경을 우리에게 넘겨준다. 그걸로 우리는 본다. 그가 법대에 올라 마주한 세상, 그의 눈으로 응시한 판결문 너머의 사람들을. 남들은 다 가진 인권과 기본권을 위해서 구차하게 싸워야 하는 누군가의 처지나, 끈덕진 편견 속에서 가능성을 점점 빼앗겨가는 이들의 아픔을. 덩달아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법의 한계랄지, 법의 희미한 테두리 같은 것들. 법으로도 무찌를 수 없는 거악과, 법으로도 보호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시민들 사이의 간격까지를. 이 모든 게 보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가 얼마나 좌절했을지를 상상한다. 그의 무른 심장이 얼마나 쿵쿵댔을지를 생각한다.


어려운 판례나 양형 기준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겠다. 사법의 영역은 결코 AI가 대체할 수 없다.

p.195 사법연수원에서는 실제 사건기록을 약간 각색한 시험용 기록을 주고 시험을 쳤다. 다양한 쟁점이 있긴 하지만 법리와 판례에 익숙하다면 답을 찾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와 흡사한 사건을 실제 재판에서 마주치면 얘기가 달라진다. 판단이 훨씬 어렵다.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모든 사안을 법대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원칙이 법적 안정성의 문제라면, 유사해 보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사건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거기에 맞는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의 문제다. 어떤 법관은 법적 안정성이 정의의 영역이라면 구체적 타당성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법에도 사랑이 필요하다.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만 가지고는 판결문 속의 사람을 읽어낼 수 없다. 법을 활자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판사만이 법을 잘 다룰 수 있다. 우리에겐 여전히 인간적인 인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한편, 나는 날카로운 사람을 동경한다. 이성의 칼날이 매번 반듯하게 서 있는 사람. 자기 안의 원리 원칙이 제때 공정하게 발동하는 사람.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제 말과 행동이 서로를 겨누는 일이 없는 사람. 난 그런 사람으로 작가 허지웅을 꼽는다. 그가 신작 <살고 싶다는 농담>으로 돌아왔다.


한때 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염세주의자 냄새를 폴폴 풍기던 그를 기억하는가. 매서운 눈매로 서슴없이 독설을 내뿜던 그가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혈액암이라는 중병을 앓고 난 뒤 어쩐지 확 달라진 느낌이다. 이번 작품엔 그의 고백이 다수 녹아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스스로의 판단 착오를 세상 쿨하게 인정한다. 독고다이를 외치던 자신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불행에 빠진 청년들이 자기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기까지 한다. 박애주의를 내세우는 순한 맛 허지웅은 아직 익숙지 않지만, 이런 찐한 위로를 그로부터 받는다니 어쩐지 뭉클하다. 온갖 수사로 에두르지 않는 그 특유의 문체라서 더더욱.

p.102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드는 일을 포기한 건 아니다. 아마 남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다만 애초 왜 그런 맹세를 했는지 질문을 다시 해보았을 뿐이다. 그건 버티기 위해서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p.23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병동에서 앓고 지새운 밤들은 그를 분명히 변화시켰다. 어떤 경지를 넘어섰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나 고통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거나 한 번 바닥을 찍어본 자는 통달한다거나 그런 쉬운 말로 그의 아픔을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완치라니 정말 마법 같은 일이라며 얄팍하게 추켜세우고 싶지도 않다. 몇 단어로 축약될 만한 투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의 작가적 탈피나 어떤 성취보다는 암 병동의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를 결국 이겨냈다는 사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아보기로 결정했던 용기 때문에.




언뜻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저자를 동시에 언급한 것은, 그 둘이 근본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판사 박주영은 엄정한 판결을 내리는 위치임에도 누구보다 사람을 향한 양형을 하고, 작가 허지웅은 냉소가 도드라지는 문체로도 젊은이들을 마음 다해 응원하는 글을 써낸다. 그들의 겉모습은 서로 다를지 몰라도―조금 나약해 보인다고 해도, 되려 냉정해 보인다고 해도―모두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심은 언제고 다른 사람에게 가 닿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더 촉촉해지는 것일 테다. 그 와중에 반전 매력이 돋보인다면 더욱 짜릿할 테고.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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