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살고 싶다는 농담>
p.9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판사라서 행복한데, 왜 이럴까? 판사 생활이 길어지며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행복의 총량 대신 불면과 악몽의 나날이 늘었다. 불면은 두통과 소화불량이 되고, 소화불량은 미란성 위염이 되고, 급기야 이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법원은 물론 나에 대한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도 신경 쓰지 않는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안 사실이지만 나를 힘들게 한 건, 리메이크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를 미치게 한 아이의 환영과 정확히 일치했다. 국민의 신뢰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내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했지만, 재판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빛은 고스란히 누적되어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소년재판을 할 때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 소년원으로 가며 울부짖던 눈빛, 전 재산을 사기당한 피해자의 눈빛, 성폭행 피해 여성의 분노와 수치심 가득한 눈빛, 꽃 같은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빛, 퇴근해서 집으로 오지 않고 영정사진 속으로 가버린 아빠의 눈빛, 눈빛... 그 눈빛들은 <매드 맥스>의 아이처럼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들은 집요하게 따졌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법과 법감정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는 판사이자, 스스로가 틀렸을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는 남자. 어렵게 어렵게 망치를 세 번 두드린 뒤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을 어떤 유약한 중년의 그림자가 계속 눈에 밟혔다.
p.195 사법연수원에서는 실제 사건기록을 약간 각색한 시험용 기록을 주고 시험을 쳤다. 다양한 쟁점이 있긴 하지만 법리와 판례에 익숙하다면 답을 찾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시험이었다. 그러나 이와 흡사한 사건을 실제 재판에서 마주치면 얘기가 달라진다. 판단이 훨씬 어렵다.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모든 사안을 법대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법원칙이 법적 안정성의 문제라면, 유사해 보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각 사건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거기에 맞는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 타당성의 문제다. 어떤 법관은 법적 안정성이 정의의 영역이라면 구체적 타당성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법에도 사랑이 필요하다.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만 가지고는 판결문 속의 사람을 읽어낼 수 없다. 법을 활자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판사만이 법을 잘 다룰 수 있다. 우리에겐 여전히 인간적인 인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p.102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드는 일을 포기한 건 아니다. 아마 남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다만 애초 왜 그런 맹세를 했는지 질문을 다시 해보았을 뿐이다. 그건 버티기 위해서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p.23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병동에서 앓고 지새운 밤들은 그를 분명히 변화시켰다. 어떤 경지를 넘어섰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나 고통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거나 한 번 바닥을 찍어본 자는 통달한다거나 그런 쉬운 말로 그의 아픔을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완치라니 정말 마법 같은 일이라며 얄팍하게 추켜세우고 싶지도 않다. 몇 단어로 축약될 만한 투병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의 작가적 탈피나 어떤 성취보다는 암 병동의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를 결국 이겨냈다는 사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살아보기로 결정했던 용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