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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y 03. 2019

누가 좋아요와 구독 소리를 내었는가

어느 관종의 고백



누가 좋아요와 구독 소리를 내었는가. 나다. 내가 내 입으로 저런 낯 뜨거운 요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게 되더라도 정말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과 생계가 위협될 쯤에나 할 법한 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바야흐로 SNS와 1인 미디어의 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분주하다. 이미 내 주변에도 몇몇이 유투버를 꿈꾸며 그 피 튀기는 레드 오션에 뛰어들었다. (내 다리에 주릿대를 끼워 비트는 한이 있어도 지인의 오글거리는 셀프 영상을 보진 않을 것이다.) 유튜브 시청 시간은 다른 매체들을 비웃듯 매 분기별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계정이 없으면 무장공비나 냉동인간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누군가가 자기의 끼니를 매일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도, 누군가가 예쁜 카페나 풍경 사진을 매일 업로드하는 것도, 누군가가 혼밥이나 쇼핑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하는 것도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세상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힘은 사람들의 '관심'이다. 예컨대 소셜 네트워크 속에서 라이크 수는 화폐처럼 기능하고(실제로 금전으로 치환 가능하기도 하고), 팔로워 숫자는 이미 하나의 스펙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좋아요나 구독, 팔로우 요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의 부가 그렇듯이 관심 역시 불평등하게 분배되는데, 20%의 상위층이 80%의 부를 독차지한다는 어떤 경제학 법칙을 가뿐히 뛰어넘어 훨씬 가파른 피라미드를 쌓아 올린다. 관심은 수량화되어 표기되기에 이제는 사칙연산이 가능한 개념으로 탈바꿈했고, 그에 따라 몇 배의 사랑, 몇 곱절의 관심 같은 말들이 더 이상 비문이 아니게 되었다. 더욱이 그 숫자들은 비교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을 직격으로 건드려 우리에게 때때로 이름 모를 우울감과 고민거리를 안겨주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내 얘기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그러니까 노트북 한쪽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글들을 굳이 세상에 내보이려고 마음먹은 것도, 점점 살기 팍팍해지는 세상에 참기름 같은 관심이나 한 스푼 얻어볼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기록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였다고 아무리 포장해봐도 어느새 슬금슬금 조회수에 신경 쓰는 나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땐 도무지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단조롭고 유치한 글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거나 서점 매대를 점령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급성 복통에 시달리는 것을 넘어 랜선 너머의 어드메쯤 있을 독자들이 괜히 얄미워지기까지 한다. 내 글은 구천을 떠돌다가 영영 잊혀질 팔자인데. 엉엉.


물론 나는 생업으로 글을 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라이크를 얻기 위해 정수리에 간장을 쏟는다던가 한쪽 눈썹을 시원하게 밀어버린다던가 하지도 않을 거지만, 사뭇 냉정한 현실 앞에서는 이렇마음이 도리질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철저히 외면당할 리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라고. 대중의 입맛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어 관심법이라도 쓰고 싶은 지경이지만, 나는 궁예도 김영철도 아니므로 이제는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처음부터 나의 능력이 턱없이 모자랐던 걸지도 몰라, 나너무 오만했고 기대치너무 높았던 거야, 라고.


그럼에도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함께 들을 노래 : 검정치마 - 좋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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