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5월에 아버지를 빌런으로 빗대는 불효자가 여기 있다. 다소죄스럽긴 해도아버지가 어린 시절 내 일기장에서 자주 악당으로 등장한 건 사실이다. 엄마를 괴롭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내가 그의 핏줄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정도로.하지만 그런 그를 나는 가끔 떠올린다. '떠올린다'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버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가장 최근에 그에 대해 생각한 것은 지난 월요일이었다.
모임에서 롤모델의 닮고 싶은 모습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누군가는 어떤 래퍼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꼽았고 누군가는 가까운 친구의 명민한 자질에 대해 얘기했다. 힐러리, 이태석 신부님, 아이유 등 여러 유명인사가 등장하는 와중, 한 사람은아버지의 성실함을 닮고 싶다고 밝혔다. 그 미덕을 바탕으로 자수성가를 이뤄낸 아버지를 존경한다고도 했다. 거기에 공감하는 착하고 바른 아들, 딸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나만 빼고.
내가 그 분위기에 쉽사리녹아들 수 없었던 까닭은, 나는 그 후에 이어진 '닮고 싶지 않은 대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그 주인공으로 밝혔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의 롤모델로 앞서 소개된 성실하고 듬직한 아버지들과 비교되어 괜히 우리 김 사장님의 단점만 부각되는 것 같아입을 열기가 다소 망설여졌으나, 이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도 그에게서 온 것이리라. 멀리서도 이해해주실 것으로멋대로 믿으며 닮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특징들에 대해 죽 열거했다. 다혈질인 성격부터 시작해서 꺾이지 않는 고집과 화가 나면 막무가내로 높아지는 언성, 그리고 곁에서 너무 오래 본 탓에 넌덜머리가 나는 그의 사소한 습관들 따위에 대해서. 그리고 나는 잔인하게도, 그가 선택하지도 않았고 어찌할 수도 없었던 암 병력까지 그 리스트에 덧붙였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멋진 구석이 더 많았다. 요즘 말로 '핵인싸'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 잘 믿고, 남들 어려운 꼴 못 지나치고, 자기 주머니 사정 계산 안 하고 술값이나 밥값을 턱턱 내는 남자답고 호탕한성격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따르는 인간미와 누구와도 쉽게 친해져서 금방이라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타고난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고지금도 회자된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서 찍은 사물은 지나치게 확대되거나 쉽게 왜곡되어 버리듯, 가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아버지의 삶은너무도 남루했더랬다.
거듭된 사업 실패로 인해 잊혀져가는 가장으로서의 존재감, 그것을 되찾기 위한 조급한 노력이 또 다른 실패로 이어지는 악순환. 그런 성과 없는 분투를 등진 채 성장해버린 자식들, 중년의 여성 호르몬으로 겨우 차분해질 무렵 찾아온 불청객 췌장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사다난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을 내가 비로소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무렵 그는 훌쩍 떠났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그 흔한 '엄마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 한 마디도 없이. 아, 야속한 사람.
실제로 나는 아버지와 닮는 것이 두렵다. 그의 고독, 그의 노여움, 그의 허무, 그의 마지막을 나는 절대로 답습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살 작정이고그러기 위해서 그가 물려준 입맛이나 좋지 않은 몇몇 버릇들을 고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따금씩 나에게서 아버지의 특징들을문득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를 서른여섯에 낳은 아버지의 이십 대를 내가 본 적 없건만그의 얼굴이 스물여덟의 내게 벌써부터 드러난다는 건 나로서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아버지는 적어도 노안은 아니었는데. 앞으로 서른이나 마흔 또 예순 넘어 변하는 내 모습에서 당신의 흔적을 얼마나 더찾아내게 될지 조금 무섭기도 하다.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끊임없이 내달려야 할까 아니면 당신을 자주 떠올림으로써 그 얼굴에 익숙해져야 할까. 아니면 혹시 아버지가 너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지. 결국 그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마음 깊이납득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런 막연한 걱정들 사이에서나는통 갈피를 잡지 못하고,맘만 먹으면 아무 때고아버지에게 전화를걸수 있는 이들이 못내 부러울 때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