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주머니 사정이 썩 좋지 않았던 우리 커플은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다. 당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던 나였으므로 현금영수증이나 소소한 포인트 적립은 그녀의 몫이었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소일거리는 늘상 나의 차지였다. 옆구리만 찌르면 나오는 관등성명처럼 착실하게 연인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그러던 어느 날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뿔싸, 내 손가락이 그녀의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를 누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 전에 헤어진 당신의 번호를 말이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손은 익숙하게 번호판을 미끄러지듯 그 옛날의 여덟 자리를 완성해갔다. 부러 외우려고 한 적도 없는 당신의 번호가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당신과 아프게 헤어지고 난 뒤 결코 그리워한 적 없는 당신의 얼굴이.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는 당신의 웃음소리가.
우리는 실로 열렬하고 지긋지긋하게 사랑하였다. 당신이 있음으로 나는 사랑을 알았고 또 무지하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도 싶었다. 당신을 이만큼이나 사랑하는 내가 뿌듯했다가도 당신을 그만큼이나 실망시키는 나를 혐오하기도 했다. 우리는 용솟음치는 젊은 혈기를 사랑에서 질투로, 미움에서 다시 사랑으로 치환해가며 쏟아냈고, 그것은 우리를 한 뼘 더 성장시킴과 동시에 멀어지게도 했다. 우리는 땅따먹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땅을 차지하고 싶어 시시각각 안달했고, 서로가 손아귀에서 벗어날 참에는 사방으로 속이 탔다. 내가 상대의 영역 속 깃발을 빼앗아 돌아오는 동안 상대는 내 영역의 다른 깃발을 가지고 도망했다. 결국엔 합이 0이 되는 사랑의 동적 평형 속에서 우리의 기력은 끝끝내 소진되었다. 서로를 힘껏 껴안는 데에만 써도 모자랐을 시간들을.
그렇게 조금씩 기억 저편을 더듬어 나가던 찰나. 이내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연인의 번호를 재빨리 떠올려내 상황을 모면했으나, 그때 당신이 어디선가 나를 부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 그 날의 비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당신의 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