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호주 오픈. 지난 일요일 2022 호주 오픈의 결승전이 열렸고, 우승컵은 '흙신' 라파엘 나달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우승은 그저 단순한 '우승'은 아니었으니.
09년도 우승 후 13년 만의 왕좌 재탈환이라는 점도,
이번 우승으로 그가 세계 최초로 메이저 대회 21관왕―빅 3로 불리는 노박 조코비치와 로저 페더러도 이루지 못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 것도,
부상을 안고 참여한 경기에서 5시간 24분 동안의 풀세트 접전을 치른 끝에 역스윕 우승을 따냈다는 사실도 그걸 다 설명하지 못한다.
작년 호주 오픈에서 젊은 피 치치파스에게 역전패, 자신의 주 무대였던 프랑스 오픈에서도 라이벌 조코비치에게 패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 부상으로 2021년 하반기를 아예 포기했었던 나달이다. 은퇴를 고려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을 정도다.
그런 나달이 재활을 거쳐 2022 호주 오픈에 참가했으니 그를 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랭킹이 높고(2위 vs 6위) 열 살이나 어린 메드베데프와의 결승전에서 나달이 언더독(도전자)로 평가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도박사들도 메드베데프의 승리를 점쳤다.
경기가 시작하자 그 예상은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메드베데프에게 나달이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모습이었다. 라이브 경기를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메드베데프는 서브 에이스 등으로 손쉽게 득점을 만드는 데에 비해 나달은 점수를 매우 힘겹게 따내곤 했다. 결국 2세트를 내리 내주는 나달.
하지만 점차 나달이 분위기를 가져오기 시작하는데. 절체절명의 3세트, 40:0 으로 몰린 서비스 게임에서도 끝까지 따라가 한 점을 지키고, 공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집념이 경기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팬들도 '끝났다'고 믿었다는 3세트를 가져오고, 기세를 몰아 4세트까지 따내 결국 풀세트 접전까지 게임을 끌고 오는 나달. 메드베데프의 다리가 무거워진 틈을 타 구석구석 샷을 꽂아넣거나 절묘한 드롭샷으로 꾸역꾸역 점수를 쌓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관객들의 함성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스포츠에서는 확실히 판세가 무섭다)
5세트 역시 예측불허. 정말 엎치락 뒤치락 어지럽게 흘러갔지만 결국 사소한 샷 하나, 끝까지 대시해서 건져낸 포인트 하나로 우승까지 따내는 라파엘 나달. (이 경기를 라이브로 보다니.. 감격..)
다음은 수상 소감 번역. 발번역인 점 감안하시길.
Good evening, everyone, or now good morning at least. (crowd laugh)
(참고 : 경기는 현지 시간 저녁 7시에 시작해 5시간 이상 이어졌다)
먼저, 다닐(메드베데프)에게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다닐, 너에게는 지금이 괴로운 순간이겠지만.. 네가 얼마나 훌륭한 플레이어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네가 이 (호주 오픈) 우승컵을 앞으로의 커리어 동안 몇 번은 들어올릴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챔피언이 될 너를 미리 축하하고 싶다. 오늘 결승전은 내 커리어를 통틀어 매우 북받치는 경기emotional match 중 하나였다. 그런 경기를 너와 함께 해서 영광이다. 진심으로 행운을 빈다.
우승 후 첫 마디가 상대 선수에 대한 리스펙 메시지라니. 괜히 월클이 아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해서 한 달 반 전만 해도 호주 오픈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트로피와 함께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해왔는지 아마 모르실 거에요. 너무나도 감격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호주에 와서 경기 하는 내내 그동안 (관객들께) 받은 지지support와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3주 간의 오픈 일정 동안 호주 관객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준 열정은 제 가슴에 오래오래 간직될 겁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한 팀원들, 코치들, 가족들, 지금 여기 함께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큰 마음입니다. 그들이 있어 작년의 어려움, 선수로서 가장 침체기에 있던 기간을 극복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달은 쭉 내리막을 걷다 21년 여름 프랑스 오픈 이후 발 부상으로 시즌 아웃, 은퇴까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호주 오픈을 잘 성사시켜준 모든 자원자들, 동료 선수들, 스폰서들에게 감사합니다. 특히 제가 테니스를 시작할 때부터 개인적으로 서포트를 해준, 스폰서 KIA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코로나라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호주 오픈을 잘 성사시켜준 craig(호주 오픈 조직위원회 CEO)을 비롯한 사무국에도 감사를 표합니다.
기아는 나달이 무명일 때부터 18년 넘게 개인 후원을 한 것으로 유명하고, 그만큼 나달의 기아 사랑은 각별하다.
사실 한 달 반 전만 해도 '이게 내 커리어의 마지막 호주 오픈이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더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샘솟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내년에도 이 자리에 서겠습니다. Thank you very very much and see you soon.
마지막 "see you soon." 이 너무 멋있다.
다음은 경기 후 인터뷰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 일부 번역.
기자 : 두 세트를 내준 3세트 여섯 번째 게임(2:3)에서 트리플 브레이크 포인트에 빠졌는데,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나.
나달 :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스포츠는 늘 예측 불가능하지 않나. (...) 사실 이번 대회에서 나는 많은 기회를 놓쳤고 불운도 많이 겹쳤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기회를 준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경기 내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분명히 방법은 있을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걸 (진심으로) 믿었다. 그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믿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행운도 도와주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 몰리는 상황에서도 '방법은 있다'는 것을 실제로 믿었다는 무한 긍정 마인드. 강철 멘탈. '불굴不屈의 의지'가 무엇인가 온 몸으로 증명해보이는 그. 아니 그냥 '불굴不屈' 그 자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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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준우승자 다닐 메드베데프는 결승 후 인터뷰에서 호주 관중들의 disrespectful한 모습을 지적했다고 한다. 나달과의 경기 내내 자신이 야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괜히 그랬을까? 메드베데프는 결승까지 올라오는 내내 심판 혹은 사무국에게 투덜대거나 항의하는 모습을 유독 많이 보였다. 무엇보다 관객을 도발하는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메뎁은 테니스계에서 까칠한 걸로 유명하다)
스페인 국적의 나달이 호주에서 홈 어드밴티지 수준으로 응원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태까지 커리어를 통틀어 보여준 품격이 메드베데프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말의 방증이 아닐까 싶다. (세계 랭킹 1위 조코비치도 스스로에게 빡치면 라켓을 부수곤 하는데.. 페더러와 나달이 랭킹이 그에 비해 한참 뒤지지만 여전히 팬이 많은 이유가 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발 부상으로 인한 통증은 어떠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오늘 밤엔 전혀 없었다. (경기에서) 보셨겠지만, 나는 무제한으로 뛸 수 있었다.
It was no pain at all, as you can see, I was able to run without limitations.
한 인간의 도전과 승리를 라이브로 지켜본 느낌이라 내겐 너무 값진 다섯 시간이었다. 그가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VAMOS RAFA!
(202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