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지음, 1998.
익명의 무뢰한에게 <어벤저스:엔드게임>의 결말을 폭로당해 하루가 통째로 짓밟혀버린 오늘, 다른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 격인 서평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모순적이지만, 모순적이므로 그 자체로 소설과 맞닿아 있기도 할 것이다. 다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의 말'에 나와 있는 두 가지 당부를 미리 밝혀둔다. 1.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을 것. 2. 어떤 독후감에 침범당하지도, 어떠한 선입견도 자리하지 않은 상태로 읽을 것. 작가의 소망에 친절히 응답하고 싶은 사람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도 좋다. (하지만 예고편의 유무나 완성도와 관계없이 수작은 수작이고, 나는 이번 주말 어벤저스를 상쾌한 마음으로 볼 것이다.)
수많은 책들을 뿌리치고 무언가에 홀리듯 양귀자의 소설을 또 집어 들었고, 집어 든 자리에서 벌컥 다 읽어버렸다. 이번에는 삶과 사랑에 관한 질문이다. 작가는 주인공 '안진진'의 입을 빌려, 극명하게 비교되는 어머니 자매의 인생과 또렷하게 구분되는 두 남자에 대한 감정에 관해 동시에 서술한다. 그러면서 삶이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가, 사랑의 실체적 증거는 무엇인가, 같은 물음들을 번갈아가며 쏟아낸다. 하지만 현실에서 삶과 사랑이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듯 소설에서도 그것들을 개운하게 갈라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의문점들은 뒤엉켜 제시된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에 대해 비장하게 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랑의 정의에 대해 따져 묻는가 하면, 사랑이 절정에 치달을 때는 오히려 현실의 가장 누추한 곳으로 낭만을 끌고 내려오는 식이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이 난 후부터 나는 나를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김장우는 언제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런 뒤에도 아무렇지 않았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느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튀어 오르는 송곳 같은 대사들은 나의 궁금증과 취향을 정확히 꿰뚫어낸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 있다.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무엇, 깨어져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이밖에도 소설의 마운드 한가운데에서 작가가 투수가 되어 뿌려내는 밀도 있는 직구와 변화구는 타석의 '안진진'을 끊임없이 골몰하고 분투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들 역시 편하게 공의 궤적이나 감상하며 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책을 덮고 나면 틀림없이 우리에게로 타순이 돌아올 것이므로.
나는 소설을 읽으며 그 속의 수많은 질문들을 마음속으로 되물었다. 그 중 나를 가장 머뭇거리게 만든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현실을 좇을 것인가, 이상을 택할 것인가. 줄곧 가슴속에 품어왔으나 여태 한 번도 시원하게 답해낼 수 없었던 물음이었다.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모호해져만 가는 그 결론을, 도저히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에게 미루고만 있는 너절한 마음을 작가에게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 책으로 나는 약간의 위로를 얻는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요한 것이고 선택에 대한 고통 없는 삶이란 서서히 죽어가는 생과 다름 아닐 것이기에.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모순들을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양가감정이 그러할 것이고 누군가에 대한 애증이 그러할 것이고 무언가에 관한 추억이 그러할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삶의 다양한 모순들이 밟고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 아니라, 고쳐 수정해야 할 오점이 아니라, 계절이 변하듯 너무도 당연한 인생의 속성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닫는다.
(2019.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