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 관람기
지난 금요일, 연차를 쓰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왔다. 주변 아재들의 극찬이 끊이지 않는 바로 그 화제작. 벌써 국내에서 1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일본 현지에서는 567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만화책이 원작인 애니메이션엔 실망한 경험이 많은데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몰입감이 전혀 깨지지 않아서 좋았다. 특히 안 선생님의 볼따구 무브먼트가 아주 잘 표현되어서 흡족. 보는 내내 만화책만의 느낌이 최대한 유실되지 않게 신경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숨막히는 득점 씬의 연출은 정말.. 압권 그 잡채.
주변에서 3040 아저씨들이 훌쩍이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목격담이 끊이지 않지만, 다행히 나는 그런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물론 울컥한 순간은 몇 번 있었다. (잘 참았어..) 영상미도 뛰어나고 네이버 평점도 9.53점이니 아직 망설이는 분은 꼭 보고 오세요. 생각보다 아재들만 득시글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영화 끝나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립박수를 치는 대신 나는 곧바로 만화카페로 향했다. 품 속에 붕어빵같이 뜨끈하고 촉촉한 감동을 간직한 채. 가는 내내 '누가 이미 슬램덩크 시리즈만 다 집어갔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만화카페엔 다들 보드게임을 하는 커플들 천지였고 슬램덩크 코너 앞에는 나밖에 없었다. 아, 이렇게 아저씨가 된다.
뜨끈한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이번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에피소드들부터 찬찬히 읽어갔다. 강백호의 등장, 송태섭의 에피소드, 전국체전, "농구.. 좋아하세요?",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등 주옥같은 명대사 등등. 그러다가 잊고 있던 이름을 거기서 만났다. 흔하디 흔한 이름에 실력도 평범할뿐인, 북산고 3학년의 권준호. 슬램덩크의 진짜 주인공 ‘안경선배’ 말이다.
안경선배 권준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영화에선 다루지 않은 '능남전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무심코 시작한 농구. 어쩌다보니 채치수와 입단 동기로, 북산고에 진학해서까지 농구를 하게 되는데.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센터이자 북산의 대들보인 주장 채치수에 비해 영 존재감이 없다. 얼마나 입지가 좁았냐 하면, 선발 4인방(강백호/서태웅/정대만/송태섭)이 입단하기 전까지 북산은 '채치수 원맨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다.
게다가 선발 4인방의 입단 이후, 그는 식스맨으로 전락한다. 다섯 명의 주전과 교체가 필요할 때를 위해 대기하는 후보 선수 말이다. 방황하다 복귀한 슈터 정대만이나 1학년 에이스 서태웅에게 주전 자리를 넘겨주는 건 그렇다쳐도, 초짜 강백호에게도 선발을 양보한다. 자신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그리고 빛나야 하는 3학년 때에도 팀을 위해서 묵묵히 그의 포지션을 지킨다. 그것이 비록 빛나는 코트 위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농구 인생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었던 능남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 슛을 성공시키고 역전승의 주인공이 된 안경선배 권준호. 그 장면을 뒤로 한 채 권준호의 스토리가 빠르게 되감아진다. 채치수와 함께 입단한 농구부 첫 모습, 충격적이었던 정대만의 부상과 퇴단, 농구부원들의 이탈, 포인트가드 송태섭의 등장, 강백호, 서태웅의 합류, 모두가 함께 전국제패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연습했던 그 시간들까지. 영화관에서는 안 울었는데 만화방에서는 꼴사납게 눈물을 훔칠 뻔했다. (벌써 호르몬 교란이 오는 걸까)
어렸을 때는 무결점 에이스 서태웅이나 성장캐 강백호에 감정을 이입해서 슬램덩크를 읽었다. 나도 삶이라는 화려한 무대에 데뷔를 앞두고 있는 천재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다 더 지나고 다시 볼 때는 부상으로 방황하던 정대만의 스토리나 (이번 영화에 그려졌듯) 작은 키를 극복한 송태섭의 이야기에 주목하곤 했다. 나 역시 저렇게 휘청이고 고달팠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다시 슬램덩크를 읽고 있자니, 이것 참, 속수무책으로 권준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경기에 뛰지 못하는 후보 선수. 위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새파란 어린 에이스들에게 치이고, 꾸준하지만 뚜렷한 성과라고는 없는 만년 식스맨. 돋보이는 것 없이 착해빠져가지고 절대 주인공은 못할 것 같은, 그런 조연 중 조연에게 말이다.
한편, 3년 전 이맘때 쯤에는 이런 글을 썼다.
아무도 '네가 주인공이야' 하고 말해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실 나는 불안했다. '아마 주인공이 분명할 텐데' 속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나 주인공 맞지' 하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자꾸 물어보고만 싶어지다가, 이제는 점차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때와 달라진 사실이 있다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하게 납득했다는 것. 그리고 그 납득이 또 하나의 성취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는 것.
나는 확실히 에이스는 아니다. 심지어 주전도 후보도 아니다. 어쩔 때는 응원단이었다가 어떤 날은 볼보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괜찮다. 무대는 하나가 아니니까. 나는 화려하게 주목받지 않아도 살 만한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중인데, 잊고 있던 안경선배의 이야기를 보고 가슴에 사무치는 무언가가 있어 이렇게 후기 아닌 후기를 남기게 되었다.
권준호, 그의 이야기가 무슨무슨 천재와 에이스들로 가득한 스토리에 묻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2023.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