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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an 26. 2020

어떤 골키퍼의 눈물



프로축구 엔트리에는 통상 골키퍼를 세 명까지 두는데, 포지션 특성상 운동량이 크지 않은 탓에 주로 주전 골키퍼 한 명이 대부분의 경기를 소화한다. 많은 경기가 배정된 1부 리그 팀인 경우에나 세컨드에게 로테이션으로 가끔 기회가 주어지는 정도다. 그 둘에게 일어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서드 골키퍼가 있지만, 사실상 그가 경기에 뛸 확률은 희박하다. 구단 측에서도 비용적인 측면을 줄이기 위해 몸값이 그리 비싸지 않은 선수(갓 프로에 입성한 어린 선수 또는 은퇴를 준비하는 노장 선수)와 계약해 훈련 파트너 정도로 활용한다고 한다.


그런 현실을 딛고 데뷔전을 치른 서드 골키퍼가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이다. 그는 2003년 하부리그에서 처음 프로에 입문하여 리버풀 FC에서 서드 골키퍼로 7년 간 몸담았으나 아쉽게도 데뷔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후로도 10년을 넘게 여러 크고 작은 클럽을 전전하다가, 2019년 웨스트햄에 입단한다. 그의 나이 서른셋. 신인과는 한참 멀고 그렇다고 황혼기라고 하기엔 아직 젊은 나이에, 또 서드 골키퍼라는 기약 없는 선택지를 받아 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 앨빈 마틴이 무려 21년 동안 598경기를 뛴 바로 그 팀에서. 레전드의 아들이 서드 골키퍼라니.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자리였으리라.


묵묵히 때를 기다리던 그는 결국 팀의 부름을 받게 된다. 리그 8경기 연속 무승으로 팀이 흔들리는 위기, 주전과 세컨드 골키퍼 모두 이탈한 흔치 않은 상황. 강팀 첼시를 상대로 한 원정길. 2002년 9월 이후 첼시의 홈에서 승리가 없는 웨스트햄으로서 서드 골키퍼를 낸다는 것은 큰 도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6개의 선방을 기록하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웨스트햄은 1-0으로 극적인 승리를 따낸다. 그토록 염원하던 데뷔전, 종료 휘슬이 울린 순간 그는 경기장에 엎드려 운다. 잘 이겨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지난날에 대한 서러움이었을까.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아버지와 포옹하는 데이비드

누구보다 힘겨웠을 그의 날들을 상상한다. 주전/세컨드 골키퍼의 훈련 상대가 되거나, 주로 필드 플레이어의 슈팅을 막는 역할인 그의 일과를.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매일 똑같이 몸을 풀고, 함께 트레이닝을 받으면서도 늘 벤치에 머무르는 그의 시즌을. 분기별 신체 능력 평가를 받고, 연습 경기로 기량을 점검받을 때마다 기대감에 부풀었을지 모르는 그의 가슴을.


그러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졌을 때도 있겠다. 훈련 중 몸을 날려 슛을 막아내면서도 내일은 나오지 말아야겠다 다짐한 적도 있겠다. 별 거 아닌 장난을 크게 받아들인 나머지 틀어져버린 동료도 몇 있겠다. 팀의 레전드로 추앙받는 아버지가 괜히 미워진 날도 있겠다. 운동장 위의 물병을 걷어차다가, 힘껏 걷어차다가, 자기 자신을 걷어차고 싶어졌을 때도 있겠다. 라커룸에 걸려있는 자신의 유니폼을 보면서, 아직 나는 팀에 꼭 필요한 존재야, 작게 소리 내어 말하곤 돌아앉아 울음을 삼킨 날도 있겠다.




대상은 자기 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무 받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

아무도 '네가 주인공이야'하고 말해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실 나는 불안했다. '아마 주인공이 분명할 텐데' 속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나 주인공 맞지'하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자꾸 물어보고만 싶어다가, 이제는 점차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자꾸 도처에 저런 이들이 돋아난다. 오랜 무명 생활을 견뎌내고 마침내 수상대에 오른 배우나, 큰 부상을 극복하고 마운드에 복귀한 야구 선수 같은 이들이. 그들의 오열과 환희 사이 어디쯤의 얼굴을 볼 때면 용케 다독였던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든다.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 또 열심히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꼭 저렇게 멋지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헛된 희망으로 고문하는 저들이 미워져야 마땅한데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그냥 저들의 눈물이 어떤 증명이자 응원 같아서 함께 울음이 터질 뿐이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202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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