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 입사한 지 어언 1년.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 글을 쓴 게 엊그제 같은데. 진료실이 아닌 회사에서의 시간은 확실히 빠르게 간다.
회사 차원에서도 1년 회고 미팅도 있을 예정이지만 그에 앞서서 개인적인 소회를 남겨둔다. 전문직의 스타트업 생활이 궁금하다면 이 1년 요약본을 참고하시길. 만나는 동료들마다 회사 생활에 대해 폭풍 질문을 쏟아내는데.. 이제 그만 설명하고 다니고 싶다..
애초부터 워라밸은 기대도 안 했다. 몰입하는 경험을 위해 선택한 게 크니까. 사실 진료할 때는 시간과 체력이 비교적 남는 편이라, 쉬는 날에 소셜 모임도 하고 N잡도 하고 다방면으로 뽈뽈대곤 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그런 건 없었다. 쉬는 날에는 쉬어야 한다. 왜냐면 쉬는 날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말 출근도 종종 있고, 11시까지 야근하는 경우도 잦고, 여하간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포인트. 결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거였다면 진작 퇴사했을 듯)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고,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고, 실제로 성과가 눈에 보이니까 하는 것뿐.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현명하게 시간과 리소스를 분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더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업무를 위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다 한다' 고밖에 대답할 길이 없다. 콘텐츠 팀으로 입사했지만 요즘은 커뮤니티-콘텐츠-커머스 비즈니스에 다 발을 걸치고 있다. (그래서 바쁜 걸지도?) 최근에는 주로 프로젝트 단위로 참여해 기획과 마케팅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떤 일의 시작(기획)과 끝(마케팅)에 동시에 들어가는 일이라 나름 재미가 있다. 일이 재미있다고 하면 좀 이상해 보이나? 직장인들 다들 일하기 싫어하는 것 같던데.
한편, <미생>의 윤태호 작가님 인터뷰에서는 이런 인사이트가 있었다.
"직장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봤거든요. 그러면 대부분이 상사나 동료 뒷담화에요. 그런데 신기한 건 일하기 싫어서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자기 방식과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과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을 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일하기 싫은 사람은 없어요. 다만 내 방식대로, 나의 통찰력대로 일하고 싶은 거죠."
맞다. 내가 여기서 일이 재밌다고 느끼는 이유도 비슷하다. (운이 좋게도 나의 업무 방식이 회사와 잘 맞는다) 특히, 회사에서의 나는 목소리를 자주 내는 편이다. 자타공인 대표님과 의견 대립이 가장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언제는 팀장님한테도 대든 적도 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인 줄 몰랐다. (나는 I인데.. 사람들이 안 믿는다..)
다행히도 회사는 솔직한 피드백이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당위성과 근거만 있다면 누구의 의견도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제안하고, 또 자주 채택되는 편이다. 그런 점이 가장 큰 플러스 요소가 아닐까. 물론 가끔은 격해질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분출과 해소 기회가 없다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일하는 게 재밌는 이유는, 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그걸 가능케 해준 회사 문화와 동료들―덕분이라는 이야기.
일 년 동안 무언가 많이 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체감되는 것 3가지만 꼽으라면 :
1) 데이터 다루는 능력
특히 엑셀 작업을 많이 하게 된다. 입사 전에는 전혀 할 줄 몰랐는데 이제는 복잡한 계산기도 척척 잘 만든다. 잠자고 있던 수학 유전자를 깨우는 느낌이랄까? 학창 시절엔 어려운 수학 문제 푸는 걸 좋아했었는데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앞으로는 데이터를 단순히 테이블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비쥬얼라이징을 잘 해보고 싶다. 올해는 SQL을 배워야지.
2) 협업/커뮤니케이션 능력
매일매일이 협업이다. 내부적으로는 촬영/편집/디자인/개발/CX 등 다양한 전문 인력과 소통한다. 외부적으로는 학회나 선배 원장님들과 연락하는 일이 잦다. 자연스럽게 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게 말할지부터, 협상과 설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탁은 지시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까지. 해도 해도 늘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고 있다.
3) 승모근 (a.k.a 거북목)
진료하던 시절, 직장인 환자들을 보면 항상 잔소리를 했다. 30분에 한 번씩 일어나서 허리 스트레칭 하세요, 하루 세 번은 천장을 보면서 목을 젖히세요 등등. 그러나 내가 막상 그 입장이 되니 하나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 아니, 절대 할 수 없는 거였잖아? (주제넘게 혼냈던 모든 환자분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도 최근부터 친구네 한의원에서 꾸준히 침 치료를 받고 있다. 갈 때마다 혼난다. 이렇게 역지사지가 중요합니다.
일잘러 특징 세 가지를 정리한 영상이 있다.
그 중에서 대리급(실무자) 에이스들의 특징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상사가 요청한 걸 최우선순위로, 기한 내에, 완벽하게 처리한다.
2) 혼자서 다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적절히 부탁하고 지시하면서 많은 업무량을 쳐낸다.
3) '내가 팀장이 된다면?' 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미리미리 리더십을 준비한다.
딱 내가 지금 끙끙 앓고 있는 고민과 일맥상통하는 조언이다. 앞으로 내 아래로 주니어들도 들어올테고 언젠가는 팀을 이끄는 위치에도 있을 수 있다. 일잘러의 세 가지 조건을 마음에 새기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겠다.
입사 후 1년 동안의 목표는 그냥 심플하게 '대표의 모든 걸 똑같이 복사하기'였다. 앞으로 1년의 목표는 '명실상부한 사내 에이스'가 되는 것. 그만큼 역량을 인정받는 것. 그리고 만들고 싶었던 콘텐츠도 많이 만드는 것. 업무에 찌들어서 콘텐츠 기획에 게을렀다. 회사 차원에서 유튜브나 하나 하자고 할까? 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긴 한데..
그나저나 속세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 다음 주에는 템플스테이 하러 떠납니다. 입사 1년 기념 템플스테이. 절밥 먹고 자연 속에서 1박 2일 동안 디톡스 하고 올게요. 안녕.
(2023.03.02)
템플스테이 하고 옴. 강력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