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롭고 흥겨운 정도가 하늘을 찌르는 영화 <알라딘>을 보고 왔다. 엔딩 크레딧을 등지고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도 어깨가 들썩이는 걸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밤거리를 홀로 운전하며 집에 돌아오면서 방정맞게 몸을 흔들다가 길을 몇 번이나 잘못 들었다. 평소 춤이라면 질겁하는 나에게 이 정도로 과격한 관절 운동을 가능케 한 영화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감상 포인트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1) 1992년 발표된 원작 애니메이션에 충실하면서도 한층 더 발전한 영상미(특히 색감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과) 2) 지니 역 윌 스미스의 찰떡같은 배역 소화력 3) 쟈스민 역 나오미 스콧의 비현실적인 미모. 특히 3번에 넋을 놓지 못하는 남자 관객들이 많을 것으로 사료되므로 만약 여자 친구와 관람한다면 반드시 한 손에는 얼음물을 들고 가도록 하자. 물론 이밖에도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다. 시녀 달리아의 능청스러운 연기나,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알라딘의 화려한 춤사위 또는 원작에는 없었던 쟈스민의 멋진 솔로곡 speechless 등등.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정책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을 일부 팬들도 사로잡을 만한,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그 형형색색의 아그라바와 신비로운 마법 세계에 과몰입한 나머지 영화가 끝난 후 복귀한 현실이 다소 칙칙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도시의 야경은 그날따라 왜 그리 삭막하게만 보이던지. 더욱이 지니의 말마따나(그의 테마송 'friend like me') 내게는 지니같이 전지전능한 친구도 없고, 코끼리로 변신시킬 만한 애완동물도, 이성과의 낭만적인 드라이브를 도와줄 마법의 양탄자도 없다. 무엇보다 쟈스민처럼 아리따운 애인도 없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나는 다행히도 알라딘처럼 소상공인들을 등쳐먹으며 살아야 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아직 그러지 않을 양심이 남아있기도 하다. 연비 무한의 양탄자는 아니어도 10만 km를 함께한 나의 친구 Grace가 나를 무사고로 지켜주고 있다. 소원을 세 개씩이나 이뤄주는 램프의 요정은 없지만 가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친구들이 내 곁에도 많다.
하지만 도무지 정신 승리가 불가능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 초반부, 저잣거리에서 알라딘과 쟈스민의 운명적 만남 장면. 그는 거지 꼴을 하고도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집으로까지 유인(?)하는 일련의 작업을 아주 매끄럽게 해치운다. 첫 만남에 집이라니 정말이지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이쯤 되면 그녀도 그의 수작을 의심해볼 법 한데, 왕궁에 오래 갇혀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인지 사람을 덥석덥석 잘도 믿는다. 아차. 혹시 그가 잘생겨서는 아닐까. 어쩐지 마을 사람들이 좀도둑인 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던데. 게다가 그의 첫 번째 소원이 '아그라바 최고의 미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꽤 일리 있는 추리다. 운명적 만남의 충분조건은 정녕 빼어난 외모란 말인가. 결론이 이렇게 흘러가면 곤란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뭔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태생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둘을 사랑으로 묶어낼 수 있었던 것은 진정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라딘과 쟈스민, 둘 모두의 용기 덕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 선뜻 다가갔던 용기, 그녀가 마침내는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었던 용기. 서로에게는 큰 도박이었을지 모르는 선택이 결국 그들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었다. 이야기의 제목이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알라딘>인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던 그 대담함이 아니었으면 램프의 요정의 해방도, 아그라바의 첫 여성 술탄도, A whole new world라는 걸출한 음악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혼자여서 외로운 이들이여, 오늘도 용기를 내자. 당신은 거리의 좀도둑이 아니고 상대도 일국의 공주일 리 없으니 알라딘보다 상황은 훨씬 낫다. 점점 흉흉해져만 가는 세상에 접점 없는 완벽한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두려운 일일 것이나, 거듭된 사랑의 좌절로 또 새로운 이를 삶의 안쪽으로 들이는 일이 이젠 겁나는 일일 것이나, 그래도 마음을 열고 한 발을 떼자. 사랑은 용기가 만들어낸 아주 작은 틈에서 발아한다. 비록 당신이 운명을 믿지 않는다 하여도, 우연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여도, 사랑은 그렇게 이룩되고야 만다.
(2019.06.11)
함께 읽을 책 : <사랑의 몽타주> 최유수 지음, 2017. 디자인이음
애니메이션에는 애니메이션 만의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