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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표어가 있다면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Set it up> <조 Zoe>

by 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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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는 사뭇 다르지만 내게 동일한 물음을 안겨준 영화가 있다.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Set it up> 그리고 <조 Zoe>. 하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발랄한 로코물이고, 다른 하나는 AI 시대의 사랑을 그린 꽤 묵직한 멜로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하여.




먼저 <Set it up>을 보자. 아무 기대도 없었던 탓이었을까,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전반적으로 흐르는 유쾌하고 위트있는 분위기도 좋았고, 남녀 주인공의 깜찍하면서도 진솔한 연기도 매력적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다소 맛없어 보이는 피자와 뻘쭘한 두 남녀가 만들어낸 영화의 절정 피자신. 감미로운 배경음악 덕분에 근래 봤던 어떤 장면보다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야심한 밤, 한적한 공원 또는 방 안, 썸 타는 관계에서 그 노래는 가장 강력한 치트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음원은 없다

다만, 두 비서를 지켜보며 왠지 모를 씁쓸함도 들었다. 직장인들은 다 저렇게 고달픈 직장 생활을 하는건가. 상사를 잘못 만나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아, 취업하기 싫다.




한편, <Zoe>는 생각보다 평이했다. 동일한 소재로 이미 <Her>라는 걸출한 작품이 있어서 기대치가 높아진 걸지도 모르겠다. <Her>가 과학 기술에 대해 말을 아끼는 대신 주인공의 감정선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관객을 이끈다면, <Zoe>는 미래 시대의 사랑에 관해 너무 많은 메시지를 담으려 하다보니 다소 산만해지는 느낌이 있다. 정작 중요한 두 존재의 감정 교류엔 개연성이 희박하다. 게다가 자신이 인공물임을 깨닫게 된 그녀의 참담함이나 인간들과 어울리면서 느꼈을 그녀의 자괴감에 대해, 영화는 야박하게도 최소한의 신만을 할애한다. 또한,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끌리는 남자의 속마음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부연설명이 없다. 감정 이입에 실패한 관객은 그저 그의 혼란과 그녀의 곤란을 멀찍이 지켜볼 뿐이다.


영상미는 인정하는 부분

장점을 꼽자면 단연 영상미다. 캐나다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도시의 색감, 근교 자연의 풍광, 주인공의 방에 이르기까지, 카메라가 이동하는 공간과 배경마다 서정성이 물씬 느껴진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두 남녀가 다이빙하는 장면.



최근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상대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와는 넘어야 할 허들이 너무 많은데도, 주변 사람들이 왜 만류하는지 다 알겠는데도, 결말이 어떨지 뻔히 보이는데도, 무언가에 홀린 듯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엔 일종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건 고민이라기보다는 자랑 같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걱정을 늘어놓는 그가, 솔직히 나는 부러웠다. 어떤 편견과도 기꺼이 맞설 그가, 그들만의 견고한 세상을 빚어낼 그 사랑이, 견딜 수 없게 샘이 나는 것이었다.


앞선 두 영화는 사실 같은 이야기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는데, 당신과 성공적인 관계를 유지할 확률은 0%로 수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발되는 사랑의 불가해함에 관한 이야기. 낭만적이라고 칭송하다가도 미련하다고 폄하하기도 하는 사랑의 한 양태에 대한 이야기. "결국 영원한 것은 없다"는 서늘한 진리의 목전에서도 기어이 벌어지고 마는 사랑의 끈질김에 대한 이야기. 사랑은 때론 그렇게 온 우주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도 가능케 한다. 사랑에 표어가 있다면 이보다 적확한 말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08.11)



함께 들을 노래 : Adam bravin & Estero - Come go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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