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느끼는 바는 천차만별이다. 뚜렷하게 느끼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을 구현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감수성과 표현력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껏 그 능력은 연습과 노력으로 배양된다고 믿어왔는데, 이슬아를 만나고 나서 조금은 좌절했다. 그녀는 그 두 영역 모두에서 완벽한 재능충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비단 문장력이나 어휘력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먼저는 감수성이다. 말하자면 감각하는 영역이 넓고 사고의 폭이 깊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감정도 면밀하고 정교하게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최고의 카메라다. 사유의 화각이 넓고 생각의 해상도가 높다. 감정의 초점도 이탈하는 법 없다. 처절한 성찰과 촘촘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녀 눈에 닿는 모든 것은 글감이 된다. 글에 등장하는 것은 상황 묘사와 주관적 느낌이 전부인데도 공감과 감동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기 같기도 고백 같기도 한 글에는 왜곡이나 과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표현력의 개인차에 순위를 매기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두 가지 잉크의 프린터와 다섯 가지 잉크의 프린터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에 비해 후자로 인쇄된 세상이 훨씬 선명하리란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프린터로 치자면 이슬아는 3D 프린터다. 선명함을 넘어서 입체적이다. 그녀는 본인의 감정과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글 속에서 다양한 색채로 재현해내고, 내면의 목소리와 외부의 말소리를 넘나들며 순간을 세밀하게 복원해낸다. 마치 잘 편집된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이슬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녀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그녀는 현실에 짓눌리지도, 세상과 아주 동떨어있지도 않다. 관조적이다가 한껏 질척대기도 하고 끝모르게 발칙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잖아진다.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글 속에서 자신의 부모님을 이름으로 부른다. '저건 선 넘는 거 아닌가' 하는 경직된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호칭이 아니라 애정과 존경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당당하게 보여준다. 기존의 질서와 관념을 아주 유연하게 파괴하면서 그녀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실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의도된 바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컨셉질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작년이었던가, 이미 레드오션인 출판업계에 이슬아는 혈혈단신으로 등장했다. 문단도 아니고 글쓰기 플랫폼도 아닌 구독자의 메일에 글을 직배송하는 전무후무한 연재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그녀는 한 달에 스무 편의 에세이를 평일 정해진 시각에 보내주는 독창적인 시스템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다작 능력에 한번 감탄했고 그녀가 밤낮으로 빚어냈을 글의 신선도와 완성도에 또 한번 감탄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좋은 에세이를 매일 받아보았을 구독자들에 대해 상상했다. 그들은 저녁 무렵 전송될 그녀의 글을 기대하며 얼마나 설레었을까. 고단한 하루 끝에 아직 읽을 무엇이 남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심했을까. 나는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라 영화건 드라마건 재밌는 시리즈물은 아예 모아놓고 한꺼번에 봐야 직성이 풀리는 편인데, 그녀의 글이라면 왠지 기다리는 맛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누군가가 기다리는 글을, 누군가에게 약속할 수 있는 글을 언젠가는 꼭 쓰고 말리라.
(2019.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