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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좁아터진 신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by core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1992.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아끌거나 다짜고짜 현관부터 두드리거나 하는 식의 무모한 전도로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듯, 나는 최근 몇몇의 일방적이고 과격한 페미니즘 운동들과 그것을 일차원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정치인들에게 질려버린 참이었다. 그들의 해괴망측한 논리와 계산 공식에 망연자실해질 무렵 이 소설을 만나게 되었는데, 요즘 여성소설이라고 이름을 달고 나오는 보잘것없는 책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뜩이는 재치와 날 것 그대로의 외침이 돋보이는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설정이나 등장인물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과장될지는 몰라도, 차별에 대한 경험들을 일반화해 엮어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내게는 훨씬 호소력 있고 솔직하게 들린다. 남성의 입장에서 읽는 데에 불편한 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작가는 여성 우월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캐릭터 ‘강민주’를 화자로 내세워 극을 이끌어가며 남성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군데군데에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일종의 소시오패스인 그녀는 자신만이 이 썩어빠진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뭇 여성들의 이상형인 초절정 인기 남배우 ‘백승하’를 납치하여 감금하는 것으로 발현된다. 그 불쌍한 남자의 죄목은 바로 여성들을 혼란에 빠트린 죄,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 대해 환상을 갖게 한 죄. 그녀는 그를 본보기로 하여 남성 중심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고자 하나, 이런, 납치한 대상이 너무 순수하고 매력적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그녀는 점점 말랑해져만 가고 스토리는 속도감에다 생동감까지 더해 내달린다. 흡사 롤러코스터 같은 전개와 서슬 퍼런 문장들에 마음을 빼앗겨 넋을 놓고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극은 결말을 코앞에 두고 있을지 모르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부디 나처럼 단숨에 읽어버리는 과오를 저지르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렇듯 영화 <올드보이>로 우리에게 익숙한 납치/감금 설정(원조는 이 작품이다)과 스톡홀름 신드롬의 달큰한 긴장감이 적절히 버무려진 곡예와도 같은 서사 속에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접했던 사람 냄새 풀풀 풍기던 원미동 주민 양귀자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문장들은 뜨겁고 날카로워서 나는 이따금씩 베이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그녀는 소설을 쓰려고 했다기보다는 세상에 대하여 화를 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다만 아주 우아한 방법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멸시를 면전에서 겪어내야 했던 본인 세대의 울분을, 마치 활자로 쏟아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강민주'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온갖 위악을 부리면서도 미처 질러내지 못한 앙금이 남았을 것이다. 그 응어리가 지독하게 그녀를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문득 그녀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요사이 뉴스의 연예와 사회면이 시끌벅적하다. 그녀의 소리 없는 절규로부터 27년 후 현재, 여성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이나 직접적인 차별은 줄어들었지 모르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질 나쁜 인간들이 여성을 탐욕적으로 대상화하는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도, 기술의 발전을 무기 삼아 더욱 악랄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라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세상의 무감각을 깨기 위해 분투했던 그녀에게, 그 시절에 비해 시대가 크게 진보했다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다행히 퇴보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할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구차하게 만든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유난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비열한 일 것이다. 우리가 신어보지 못한, 신어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여성이라는 이름의 신발은 너무 오랫동안 구겨지고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제는 그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야 할 때다.


(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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