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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만의 자기소개

첫 소셜 모임 후기

by core


태초에 세상이 열리고 만물이 생겨난 이후로 인류에게 가장 어려웠던 도전 몇 가지를 꼽는다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행기의 발명,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자기소개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자기 PR시대라는 거창한 시대의 부름과 맞물려 나처럼 무대공포증을 비롯한 각종 초면 포비아를 장착한 소시민들에게는 그 짧은 몇 분이 더욱 힘겨워지고 말았다. 대학 신입생 시절 괴성을 지르며 대학과 소속 학과와 이름을 세상에 토해내는 문화를 처음 접하고 심각하게 자퇴를 고려했던 나는, 몇 번의 흑역사를 생성하고 나서야 겨우 차분하게 나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낯 뜨거울 일 없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와중 최근 새로운 모임에 참여하면서 불가피하게 또다시 그 흉악한 통과의례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직업과 나이를 밝히지 말 것’이라는 신선한 규칙과 함께였다. 게다가 맙소사, 내가 첫 순서라니.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누군가가 그랬던가. 한 두대 맞는 회초리는 어떨지 몰라도 몰매는 먼저 맞을수록 더 얼얼한 법이다. 특히 첫 순서의 자기소개엔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된 나머지, 마치 재미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멍석말이를 당할 것만 같은 중압감 속에 갇히게 된다. 낯선 집단의 아직 깨지지 않은 긴장을 온몸으로 부수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입을 떼어야 하는 자의 숙명 사이에서, 나는 서글펐다.


미리 작성한 간단한 페이퍼를 바탕으로 어찌어찌 모면했지만, ‘직업과 나이’라는 익숙한 서식에서 벗어나고 나니 어떤 문장으로 스스로를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모임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껏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한 전공이나 직업 등을 소거하면 남들에게 보여줄 것이 별로 없어 다소 허무하기도 했다. 그런 공허함을 딛고 우리는 서로의 구체적인 사실들보다는 취미나 생각들과 개인적인 일화 등 추상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눴고, 지레짐작이나 선입견을 거둔 채 오가는 질문과 답변은 훨씬 생기 있고 풍부했다. 서로 직업과 나이를 모를 뿐인데 이렇게 논의가 활기를 띨 수 있다니! 결국 우리가 정말로 공유하고 싶은 것은, 이번 생일 케이크에는 몇 개의 초를 꽂게 될 것인지 또는 매일 마주하는 지루한 일상이 어떠한지 따위의 것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며 지켜낸 고유한 세계 같은 것이기 때문이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직업이, 나이가, 연봉이, 사는 곳이, 당신을 규정하려 할 테고 사회는 그것에 약삭빠르게 동조할 것이다. 당신의 4차원, 5차원, 혹은 10차원에 걸친 입체적 자아를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단면화 할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많은 이들이 그 명령 아닌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감히 사회가 부착한 이름표를 떼어내고 더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의 모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층위에 걸쳐 펼쳐진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거기서 발견한 스스로의 개성을 낯선 이들 앞에서 내보이는 데에 거리낌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당신도,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누군가가 대뜸, 저는 초록색을 좋아해요,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말라. 주선자에게 '얘 이상한 거 같아' 하고 분노의 문자를 보내지도 말라. 언제라도 우리는 세속의 기준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있고, 당신이 그 초록색을 사랑하게 될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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