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간의 소셜 모임이 끝났다. 첫 자기소개를 하면서 떨었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안녕이라니. 그동안 정이 많이 든 우리는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주제로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했다. 그래서 합의된 파이널 미션은 무려 <센 캐릭터로 변신하기-한 번도 해보지 않은 스타일로>. 2주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갈등했다. 평생 깔끔하고 평범한 옷차림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가 갑자기 어떤 변신을 할 수 있을까. 쓸데없는 시도를 했다가 팀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패션 테러범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고민 끝에 패션 유투버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꽃남방, 문신 토시, 탈색 등 과격한 아이템들이 등장했으나, 결국 캐주얼하면서도 일탈적 이미지인 스트릿 패션에 입문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는 발 벗고 나서서 나의 첫 스트릿 쇼핑의 가이드 역할을 맡아주었고, 그의 상세한 지도편달 아래 나의 탈바꿈은 시작되었다.
대망의 쇼핑 날. 홍대-합정-상수를 잇는 좁은 삼각형 속 스트릿웨어 전문 편집숍이 그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많기도 많았을뿐더러 그것은 마치 깊고도 풍부한 하나의 세상 같았다. 자유분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스트릿웨어에는 나름의 원칙과 형식이 존재했고, 그 속에도 유구한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김 교수님으로 불리는 그의 도움으로, 발품을 판지 세 시간 만에 마침내 통이 넓은 카고 팬츠를 발견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약간은 어눌했지만 생각보다 편하고 좋았다. 스타일 변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남은 과제는 상의를 매치하는 일이었는데, 올블랙으로 무난하게 가자는 나와는 달리 그는 강렬한 원색 티셔츠를 권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옥신각신을 거듭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샛노란 형광색 티셔츠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고, 김 교수님은 내내 원더풀을 외치며 나의 오버페이를 부추겼다. (네온이 이번 s/s 시즌의 핫 컬러라는 것은 결제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나의 반항적인 첫 스트릿 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란 형광 박스 티셔츠에 검정 카고 바지, 그리고 스트릿계의 바이블인 컨버스 척 테일러.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빅 백팩을 메고 김 교수님의애장품 체인 목걸이까지 매치했다. 귓바퀴에 위치한 은색 피어싱은 덤. 이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만한 대격변이었다.
천지개벽 그 자체. 우리 누나는 동생을 하나 잃은 것 같다고 했다. 주륵.
사실 그 날 당일도 과연 이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야만 하는 것일까 몇 번을 망설였다. 지하철에서도 괜히 사람들이 나를 흘겨보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변한 옷차림을 보고 팀원들이 얼마나 놀랄지 혹은 놀릴지 몹시 두렵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200% 만족이었다. 비록 머리가 망해서 모자를 써야 했지만. 나를 제외한 길거리의 누구도 나의 역사적인 출격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그날의 베스트 드레서는 올백 머리에 레오파드 셔츠를 매치한 다른 팀원이었지만. 그 모든 사실과는 상관없이 답답한 청바지를 벗어난 걸음걸이는 한결 가뿐했으며, 여유로운 티셔츠 덕에 겨드랑이는 더 이상 구슬프게 울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반짝이는 피어싱과 목걸이가 나의 존재를 온통 빛내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내내 즐거웠다.
편견을 깨는 일은 꽤나 유쾌하다. 특히 그것이 스스로가 만든 굴레일 경우 그 짜릿함은 배가 된다. 나는 내가 규정한 의복의 틀 안에 오래도록 갇혀 있었다. 그 '무난'이란 감옥 속에서 나의 무의식 속 파격적 자아는 얼마나 신음했는가. 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개성파 옷들은 장바구니 안에서 얼마나 좌절했는가. 이제 형광색 티셔츠는 나에게 있어서 도전의 증거이자 변화의 선언이다. 형광을 시작으로 나는 더욱 다양한 스트릿 룩을 시도해 볼 것이다.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하지만 나의 스타일이 완전히 돌아서 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깔끔한 셔츠와 잘 다려진 바지가 좋고, 쇼핑을 할 때도 단정한 셋업 수트에 먼저 눈이간다.다만,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음악을 바꿔 듣듯이, 언제든 내키면 변신할 수 있는 옷장 속 옵션과 열린 마음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나 든든하다.
(2019.06.21)
1. 김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그의 유튜브 링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비록 미미한 수준이지만 장차 몇 만의 구독자를 확보할 채널입니다. 그나저나 교수님 업로드 좀 빨리빨리 해주세요. 구독자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