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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un 22. 2019

가장 뜨거운 색, 형광

스타일 대격변 후기



3개월 간의 소셜 모임이 끝났다. 첫 자기소개를 하면서 떨었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안녕이라니. 그동안 정이 많이 든 우리는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주제로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했다. 그래서 합의된 파이널 미션은 무려 <센 캐릭터로 변신하기-한 번도 해보지 않은 스타일로>. 2주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갈등했다. 평생 깔끔하고 평범한 옷차림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가 갑자기 어떤 변신을 할 수 있을까. 쓸데없 시도를 했다가 팀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패션 테러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고민 끝에 패션 유투버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꽃남방, 문신 토시, 탈색 등 과격한 아이템들이 등장했으나, 결국 캐주얼하면서도 일탈적 이미지인 스트릿 패션에 입문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는 발 벗고 나서서 나의 첫 스트릿 쇼핑의 가이드 역할을 맡아주었고, 그의 상세한 지도편달 아래 나의 탈바꿈은 시작되었다.


대망의 쇼핑 날. 홍대-합정-상수를 잇는 좁은 삼각형 속 스트릿웨어 전문 편집숍이 그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많기도 많았을뿐더러 그것은 마치 깊고도 풍부한 하나의 세상 같았다. 자유분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스트릿웨어에나름의 원칙과 형식이 존재했고, 그 속에도 유구한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김 교수님으로 불리는 그의 도움으로, 발품을 판지 세 시간 만에 마침내 통이 넓은 카고 팬츠를 발견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약간은 어눌했지만 생각보다 편하고 좋았다. 스타일 변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남은 과제는 상의를 매치하는 일이었는데, 올블랙으로 무난하게 가자는 나와는 달리 그는 강렬한 원색 티셔츠를 권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옥신각신을 거듭했을까.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샛노란 형광색 티셔츠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고, 김 교수님은 내내 원더풀을 외치며 나의 오버페이를 부추겼다. (네온이 이번 s/s 시즌의 핫 컬러라는 것은 결제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나의 반항적인 첫 스트릿 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란 형광 박스 티셔츠에 검정 카고 바지, 그리고 스트릿계의 바이블인 컨버스 척 테일러.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빅 백팩을 메고 김 교수님 애장품 체인 목걸이까지 매치했다. 귓바퀴위치한 은색 피어싱은 덤. 이전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나를 알아볼 수 없을 만한 대격변이었다.

 

천지개벽 그 자체. 우리 누나는 동생을 하나 잃은 것 같다고 했다. 주륵.


사실 그 날 당일도 과연 이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야 하는 것일까 몇 번을 망설였다. 지하철에서도 괜히 사람들이 나를 흘겨보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변한 옷차림을 보고 팀원들이 얼마나 놀랄지 혹은 놀릴지 몹시 두렵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200% 만족이었다. 비록 머리가 망해서 모자를 써야 했지만. 나를 제외한 길거리의 누구도 나의 역사적인 출격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그날의 베스트 드레서는 올백 머리에 레오파드 셔츠를 매치한 다른 팀원이었지만. 그 모든 사실과는 상관없이 답답한 청바지를 벗어난 걸음걸이는 한결 가뿐했으며, 여유로운 티셔츠 덕에 겨드랑이는 더 이상 구슬프게 울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반짝이는 피어싱과 목걸이가 나의 존재를 온통 빛내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내내 즐거웠다.




편견을 깨는 일은 꽤나 유쾌하다. 특히 그것이 스스로가 만 굴레일 경우 그 짜릿함은 배가 된다. 나는 내가 규정한 의복의 틀 안에 래도록 갇혀 있었다. 그 '무난'이란 감옥 속에서 나의 무의식 속 파격적 자아는 얼마나 신음했는가. 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개성파 옷들은 장바구니 안에서 얼마나 좌절했는가. 형광색 티셔츠는 나에게 있어서 도전의 증거이자 변화의 선언이다. 형광을 시작으로 나는 더다양한 스트릿 룩을 시도해 볼 것이다.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하지만 나의 스타일이 완전히 아서 버린 것 아니다. 나는 여전히 깔끔한 셔츠와 잘 다려진 바지가 좋, 쇼핑을 할 때도 단정한 셋업 수트에 먼저 눈이 간다. 다만,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음악을 바꿔 듣듯이, 언제든 내키면 변신할 수 있는 옷장 속 옵션과 열린 마음생겼다는 사실에 꽤나 든든하다.


(2019.06.21)



1. 김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그의 유튜브 링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비록 미미한 수준이지만 장차 몇 만의 구독자를 확보할 채널입니다. 그나저나 교수님 업로드 좀 빨리빨리 해주세요. 구독자 힘들어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Juk1Y4cET5qmOau78d9Slg


2. vivastudio에서 어떠한 물품과 향응도 제공받지 않았습니다. 제 피 같은 돈 삼만오천 원 썼습니다. 옷은 짱짱하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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