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구매할 때 까다로운 검수 과정을 거치는 편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다수 존재하는가? 거꾸로 읽어도 잘 읽히는가? 진정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인가? 혹시 빌려 읽을 루트는 없는가? 복잡한 알고리즘을 거쳐 머릿속으로 결재가 완료되어도 단번에 지르는 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서 며칠 간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나의 흥미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때서야 주문한다.
하지만 위의 모든 단계를 한꺼번에 무시할 수 있는 마법의 조건이 있다. 서점에 서서 공으로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경우. 책을 넘기면서도 순식간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깝게만 느껴지는 경우.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페이지 전체를 색칠하는 상상에 빠지는 경우. 말 그대로 책에게 반해 마음을 빼앗긴 경우다. 그럴 때면 장르와 가격을 불문하고 즉시 구매한다. 그런 '바로 결제'의 영광을 누리는 책들은 많지 않다. 아니, 내게 그런 환희를 선사해주는 책들은 많지 않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 순간에는 여지없이 행복해지니까. 이성복의 시집이 그랬고, 양귀자의 소설이 그랬고, 신형철의 산문집이 그랬다. 길고 긴 공백기 끝에 마침내, 그 명예의 전당에 신간이 한 권 등재되었다. 바로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 작가의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그는 단 하나의 글로 나를 매료시켰다. 서문을 대신해 쓴 글인데, 서점에서 이 몇 줄을 읽다 말고 바로 질러버렸다. 이런 글은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길어서 다 옮길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꼭 사서 읽도록 하자.)
(...)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중략)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
이토록 따뜻하고 문학적인 서문이라니. 초장부터 이렇게 눈부시면 반칙 아닌가. 그의 정교하면서도 명료한 문체, 감히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수월하게 전개되는 그의 글솜씨는 역시 압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경외해 마지않은 부분은, 그의 인간됨 그 자체였다.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 소외된 자와 함께 행동하려는 몸짓,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건네는 눈길, 그런 것들이 책의 많은 부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는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본능적이고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감응하는 듯 보였다. 그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한결 맑아질텐데. 이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에서, 나는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논문을 쓰는 사람과 시를 낭송하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다를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컨대 시적 감수성과 학자의 냉철함은 수직선의 양 극단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펼쳐내는 세계에서 선분은 구부러져 하나의 원으로 이어지고, 두 개의 자아는 조화롭게 뒤섞여 '중용'을 낳는다. 그래서 죽음이나 전쟁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왈칵 가라앉지 않고, 한없이 일상적인 풍경을 말하면서도 결코 경박해지지 않는다. 시인과 사회학자라는 더블 타이틀이 주는 고매함에 우쭐하지도 않는다. 사회 부조리를 말하며 한껏 고독해지는 시인도, 어쩐지 귀여운 구석이 있는 교수도, 나이듦과 세대차이를 실감하며 조용히 좌절하는 40대 남자도 모두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반전 매력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19.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