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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를 일으켜주면

<진이, 지니>

by core


폭풍 같은 서사로 유명한 정유정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바로 전작 사이코패스 살인자의 이야기 <종의 기원>으로 독자들을 사정없이 휘청이게 만든 그녀가, 이번엔 휴머니즘에 판타지를 섞어서 나타난 것이다. <진이, 지니>라는 몽글몽글한 제목과 함께. 정유정과 판타지라니, 이 미덥지 않은 조합을 두고 나는 첫 장을 열기까지 오래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도, 그녀의 판타지는 오버하는 법 없이 매끄럽게 펼쳐지고 현실감을 잃지 않는 선에서 현실을 이탈한다. 그 안에서 풀어내는 따뜻한 이야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역시 힘이 있다. 그녀답게 삶과 죽음에 관한 예리한 물음들도 빼놓지 않는다.




소설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큰 사고로 인해 사육사 '진이'의 영혼이 보노보 '지니' 몸속에 갇히게 되고, 그녀는 보노보의 모습을 한 채로 낯선 타인 '민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그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두 존재가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이 꽤나 아름답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알아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만의 SOS 신호를 해독하고, 서로 소통할 방법을 고안해낸다.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홀로 된 그녀를 구출해내기도 한다. 금전적 계약으로 시작했던 그가 점점 그녀를 진심으로 배려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에겐 그제서야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이자 내 편이 생긴다. 그 둘은 제대로 된 대화 없이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비로소 영혼의 교류는 이뤄진다. 결국 그는 그녀의 뒤바뀐 영혼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너무도 다른 두 존재가 소통하는 모습,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그저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인 장면. 그 촉촉한 감동 속에서 문득 카더가든의 <그대 나를 일으켜주면>이란 노래가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잔잔한 어쿠스틱 버전으로.

그대 잠든 나를 깨워줘 / 메마른 새벽에 검은 고요 속에도 / 그대 나를 일으켜주면 / 나 손을 내밀어 품에 가득 안으리


영혼의 교류 끝에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다행히 소설은 3류 판타지 로맨스로 퇴락해버리지 않는다. 지니의 삶이냐 진이의 죽음이냐 갈등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민주는 그저 옆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한다. 그것으로 위로를 얻은 진이는 마침내 편안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생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던 민주는 그 덕분에 삶을 다시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민주가 일으켰던 진이가, 결국 다시 민주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처음 누가 누구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끝내 누가 누구를 이끌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둘은 분명히 서로에게 구원이었다.




타인의 곤경을 보고 나는(그리고 우리는) 먼저 나서지 않는 편이다. 마음으로는 알면서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과연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주변에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거야. 섣불리 오지랖을 부렸다가 머쓱해지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로 잔뜩 웅크리며 살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당신이 무심코 내민 손이 그를 일으킨다. 일어선 그가 당신을 가득 안아준다. 그 품 안에서 당신은 새로운 차원의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렇듯 내가 하나를 내주는 순간 나도 다른 하나를 얻는다는 베풂에 관한 역설적 진리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흔쾌히 손을 건네야 할 이유를 찾는다.


(2019.06.28)



함께 들을 노래 : 카더가든 - 그대 나를 일으켜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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