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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는 광광 우럭따

<그린 북>

by core


너는 기대감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어제 다녀온 짧은 산책길이 내 삶에 주어진 길 전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아니. 사실 구속보다 무서운 것은 우울이란다. 내일이 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겠구나, 하는 무기력. 가두리 그물보다 더 철저히 나를 가둬놓는 놈의 정체는 그거야. 이거? 이 낙서 같은 얼룩은 먹이가 부족해서나 바닥이 거칠어서 생긴 게 아냐. 나도 갓 태어났을 땐 너처럼 하얀 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검은 점들은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면 조금씩 생겨나. 여섯 번에 걸친 탈출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갔을 때가 아니라, 일곱 번째 가까스로 성공을 하고 난 뒤에야 바깥에 또 다른 질긴 그물이 몇 겹이고 겹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구나, 라는 확신이 들 때쯤 생기는 거지. 사실 그 후론 내 배를 들여다 볼 일도 없었어. 그러고 나니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가는 줄 아니. 어느 새 이 칙칙한 자국은 종양처럼 자라나 배를 가득 메웠고, 그건 또 가둬진 삶에 대한 낙인이 되어 다시 나를 옭아매.


정말 슬픈 게 뭔지 아니? 나는 트럭 수조마저 신기했다는 거야. 너희들은 처음 만나는 차가운 벽과 비좁은 공간 때문에 내내 어쩔 줄 몰랐겠지만, 나는 죽으러 실려 가는 이곳마저 새롭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순간 눈이 반짝였거든. 그게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먼저 가는구나. 와 너 배 진짜 하얗다. 잔인할 정도로 찬란한걸. 내 삶에서 본 적 없는 색이야.






우연히 ‘자연산과 양식 광어 구분법’에 대한 짧은 글을 접했다. 낚시로 잡은 자연산은 배가 티끌 하나 없는 순백색이고, 회갈색 얼룩이 있거나 검은 반점이 섞인 것은 양식, 또는 양식장에서 운 좋게 탈출한 놈이라는 것이다. 얼룩이 왜 생기는지 밝혀진 바는 없지만 양식장의 사육 환경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가며 자연산과 양식의 맛 차이는 실제로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기사를 접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뇌리에 강하게 남은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린 북>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으니까.


어떤 원인에서건 (그 원인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사소한 차이는 발생하고, 그 차이는 타인과의 숱한 관계 속에서 판단의 근거가 된다. 어떤 방향으로든 개인에 대한 판단이 쌓이면, 그것은 편견이 된다. 편견은 그 대상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행동반경을 제한할 뿐 아니라, 그렇게 가둬진 대상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통해 더욱 견고해짐으로써 수많은 관찰자들까지 은밀하게 손아귀에 넣는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편견의 전승이다. 예컨대 어떤 아버지가 회를 처음 먹는 어린 아들에게, 광어는 자연산이 훨씬 맛있지, 무심코 말하는 순간, 이른바 세대를 넘어 편견이 관념으로 빚어지는 순간, 그것은 도무지 깨어질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구 밖에 다른 존재, 그 중에서도 ‘색’에 대한 개념이 없는 외계인이 있어 우리를 엿보게 된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맛없기로는 똑같은 것들끼리 왜 저러나, 하겠다.


(2019.03.28.)



함께 읽을 책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2018. 한겨레출판사

<그린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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