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말했다. 가죽공예를 배우고 싶은데 그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몰라서 선뜻 시작하기 망설여진다고. 내가 다른 선배들처럼 전공만 열심히 파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모습이 신기하다는 말과 함께. 다소 경직된 직업 특성상 진로가 정해져 있고, 평균에서 벗어나는 삶이 많지 않은 탓에 나는 별종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학 입학 후로는 공부와는 담쌓고 딴짓만 골라서 했었더랬다. 캘리그래피가 유행하기 전에 전국에 몇 안 되는 학원을 찾아가 배우기도 하고, 밴드 동아리 외부 공연을 뛰느라 시험을 온통 내팽개치기도 했다. 작년에는 도자기 물레 성형에 관심이 생겨 무작정 시작하기도 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 정규 수업을 알아보고 있다. 이밖에도 산더미다. 서른전에 꼭 테니스 레슨을 받을 것이고, 제빵과 커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고, 언젠가 수화를 배워보고 싶다. 도전했다가 좌절한 재즈 피아노나 프랑스어도 아직 그 목록에 있다. 나열해놓고 보니까 정말 전공이랑은 멀고도 먼 영역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래가 막막하다.
방배동에 위치한 가죽공방. 이 집 가죽 잘해요. insta : goyu_leather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나는 왜 다양한 분야에 뛰어드는가. 돈벌이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남들에게 멋지게 뽐낼 수도 없는 미미한 경험을 왜 수집하는가.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남보다 특출난 재능이 있거나 상속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면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최대한 인간적이기위해 노력한다고.
사과밭으로 농활을 다녀온 사람은 안다. 사과 한 알이 얼마나 섬세한 풍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 그 종류는 얼마나 다양한지. 우리가 그간 사과라고 소비했던 과일은 길고 긴 유통 과정 속에서 한껏 심심해져버린, 어딘가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사실도. 그런 운명적 깨달음 이후 우리에게 사과는 더 이상 그 이전의 사과가 아니다. 사과를 먹는 감각은 조금 더 특별해지고 뚜렷해진다. 내게 많은 경험이 이와 같았다. 도자기는 내 안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몰입의 즐거움을 깨워주었다. 시를 읽고 나서부터는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 슬픔의 폭이 넓어진 느낌이다.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경험이 없었다면 마커스 밀러에게 이렇게 각별히 열광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기도 하다. 사과 본연의 맛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와 슬픔을 조금 더 소화할 수 있게 된 것과 음악 취향이 약간 넓어졌다는 사실이 향후 어떤 도움이 될까.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가 진료 활동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수화를 구사하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허나 나는 이런 가능성을 믿는다. 이렇게 무작정 삶의 테두리를 넓혀나가다 보면, 인생의 저변을 확대해나가다 보면,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아지지 않을까. 그 능력이 풍부해질수록 세상을 더 온전하고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됨이라는 것이 혹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희열과 비탄과 아름다움과 추함의 총합이라면, 나는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점점 더 인간다워진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와이파이 공유기가 있다. 우리 집 물건은 안테나가 세 개인데 요즘은 안테나가 열 개까지 나오기도 한단다. 하지만 찾아보니 안테나가 많다고 해서 인터넷 속도가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그럼 안테나 개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공유기의 지원 범위다. 신호가 얼마나 널리 퍼져나갈 수 있는지. 하나의 기기로 얼마나 구석구석 가 닿을 수 있는지. 혹 속도가 느려질지언정 얼마나 많은 단말기와 결속할 수 있는지. 무엇이 풍요로운 삶인가 생각할 때면 나는 공유기를 떠올린다. 풍요란 높이가 아니라 넓이라는 진리를 이 작은 기계가 몸소 보여주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안테나를 두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최대한 인간적이기 위해서. 생의 복잡미묘한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음미하기 위해서. 삶의 속도가 조금은 더뎌지더라도 말이다.
(2019.09.14)
성과지향적 사회에서 취미는 사치가 되고 그렇게 인간성은 일찌감치 거세된다. 하나의 목표에 매몰되어 주변을 헤아리지 못하는, 예를 들면 고시 패스를 위해 청춘을 다 바친, 사람들이 기득권을 잡고 있는 현실 속에서 상상한다. 그들에게 이렇다 할 취미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그들도 사회의 희생양이었다면,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 우리 세대는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