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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ul 29. 2019

그토록 수많은 김치

그녀가 추억하는 방법



엄마는 김치를 잘 담그신다. 서울 생활 어언 30년 차, 전라도 시골 태생인 엄마는 이젠 외모도 옷차림도 서울 사람 같은데, 김치 맛은 도무지 출신지를 속일 수 없다. 특히 김치가 잘 담가졌을 때엔 떡을 돌리듯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한다. 그러다 언제라도 한번 '김치 같은 거 못 담그게 생기셨는데~'로 시작해서 '~너무 맛있어요'로 끝나는 은근한 칭찬을 듣고 올 때면 일주일은 그 일화에 호응을 해 드려야 한다. '김치 같은 거 못 담그게 생긴' 도시적이고 화려한 외모에 뿌듯한 것인지 아니면 추켜세워진 김치 맛에 으쓱한 것인지 나는 자주 헷갈린다. (아무래도 전자인 듯하다)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입만 뻥긋하면 되는데 그 단순한 걸 못해서 종종 난처하다. 이래서 다들 딸이 최고라고 하는가 보다. 무뚝뚝한 아들은 칭찬에 인색하다.


그런 엄마는 손도 크다. 입이 두 개인 집에 왜 그리 김치가 많아야 하는지. 한번 팔을 걷어붙이면 김치통 하나로 끝내는 법이 없다. 다섯 단이 최소 단위다. 이미 냉장고에 김치가 가득한데도 우연하게 싱싱한 무나 배추를 만나는 날에는 여지없이 집에 김치판이 벌어진다. 혼자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볼일이나 보라는 엄마는, 내가 못 이기는 척 칼을 집어 들면 그제야 이것저것 부탁하기 시작한다.


오이소박이를 큰 통으로 두 통 담근 것이 불과 이 주 전인데, 오늘은 때깔 좋은 알타리를 발견했는지 부엌이 온통 무밭이다. 나는 또 그 꼴을 외면하지 못하고 말없이 가서 마늘을 찧는다. 그러면서 인건비를 청구하는 대신 잔소리를 얹는다. 우리 집 김치 소비량 1위 아버지는 세상에 없고, 2위 누나는 시집간 뒤 입맛이 싱거워질 대로 싱거워졌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김치를 많이 담느냐고. 김치가 아무리 맛있기로서니 김치만 있고 다른 반찬은 없는 냉장고가 말이 되냐고. 그랬더니 나누어 줄 집도 많고 여하튼 알아서 할 테니까 여기 와서 양념 간이나 보라신다. 얄밉게도 완벽하다.




갓 담근 총각김치는 계란 반숙을 얹은 진라면 매운맛과 찰떡궁합이다. 김치를 담근 날 엄마와 라면 하나를 나눠 먹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 남자가 있다. 이 김치면 너희 아빠가 밥 두 공기는 먹었을 텐데. 아버지는 엄마의 김치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엄마도 그 열렬한 팬심이 싫지 않은 눈치다. 긴, 아버지가 큰맘 먹고 사준 밍크코트보다 무조건적인 김치 칭찬이 엄마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역시 여자에겐 말 한마디가 중요하구나 싶다.


돌이켜보면 두 분은 김치 담글 때만은 합이 잘 맞았다. 서로를 절묘하게 보완하는 한 쌍이었달까. 칼질이 꼼꼼한 아버지는 야채 손질과 무채 썰기를 담당하고, 손맛이 야무진 엄마는 양념과 버무림을 도맡는 식이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도 박자가 척척 맞았고, 물 흐르듯 그 많은 작업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가장 중요한 간을 볼 때도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없다는 것은 우리 집에서 꽤 드문 일이다.) 나는 거기서 단순한 동료의식을 뛰어넘은 숭고한 동지애를 목격했다. 강백호와 서태웅을 보면서 그러했듯이.


나는 엄마의 생각을 대체로 잘 이해하는 편이지만 어떤 부분은 도무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구슬프게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모습이나, 상다리가 부러지게 제사상을 차리는 마음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생전에는 그렇게 원망했으면서. 그렇게 자주 다투고 애달파했으면서. 하긴, 30년 세월이 퇴적된 겹겹의 복잡한 감정을 내가 알 리 만무하다. 그저 김치를 열심히 버무리는 엄마를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한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김치 그리고 인생을 합작했던 뜨거운 동지로 남았을지도. 김치 대야를 고무장갑으로 벅벅 긁어가며 그 애증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매운 내를 풀풀 풍기는 그토록 수많은 김치로 그를 추억하고 있었을지도.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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