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는 한일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어 많은 이들이 맘고생을 했다. 지금까지도 시국이 어수선하지만 인정할 건 하고 넘어가자. 어딘지 깜찍하고 앙증맞은 패키지에 비해 51.4도라는 어마무시한 도수를 자랑하는 이 반전미 가득한 위스키를 보라. 무려 미국의 유명한 위스키 어워드에서 2018년 No.1에 등극한 월드 페이머스 위스키 되시겠다.작년부터 구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인지도가 오른 탓인지 도통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최근 우연히 방문한 바에서 마침내 발견하고야 말았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데엔 단 한 모금이면 충분했다. 오랫동안 펜팔을 했던 상대를 드디어 만났는데 외모까지 내 이상형이라면 이런 기분일까. 향긋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달다구리한 게 어쩜 맘에 쏙 든다. 술에 대해선 무식하지만 밸런스라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취향저격의 병 디자인과 라벨까지 퍼펙트. 일본에서 구하면 가격도 싸다. (아마존 재팬 최저가 2650엔) 일본에서 유학 중인 친구가 1월 귀국길에 두 병을 구해다 주기로 했다. 한 병은 야심한 밤 혼자 책을 읽을 때 홀짝홀짝 먹고 나머지 한 병은 고이 모셔둘 것이다. 언젠가 한일 양국의 정상이 화해의 포옹을 할 때쯤이면 기쁘게 오픈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훌륭한 위스키를 만드는 나라의 총리가 하루빨리 정신 차리기를 소망하면서, 아베의 눈동자에 건배. 아참, 아쉽게 올해의 술 2위에 오른 전통 증류주문경바람 오크도 참고하시라.
올해의 모임 - 크리에이터 클럽
다양한 사람들과 자유롭고 진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홍보 문구에 꽂혀 충동적으로 시작한 소셜 모임. 그렇게 비슷한 마음으로 모인 열한 명의 제각기 다른 사람들과 3개월 간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자기 분야에 열정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그들로부터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값진 성과는, 시즌이 끝난 후에도 연이 다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좋은 기회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 유튜버인 팀원의 제안으로 고정 패널로 유튜브 촬영을 해보기도 하고(보란 듯폭망했다) 취향이 맞는 팀원과 함께 꾸린 독서모임은 그 자체로 새로운 그룹이 되어 순항 중이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불러오고,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선순환. 부족한 내가 그 일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은 강남점까지 확장해서 번듯한 규모를 자랑하는 크리에이터 클럽. 시간이 난다면 이런 종류의 소셜 모임 한 번쯤은 추천한다. 다만 한 가지 경고하자면, 좋은 팀원을 만나는 것은 온전히 운빨이다. (부정적인 후기도 많이 보았다) 여태껏 인간관계에서 쌓아온 공덕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트라이.
올해의 실패 - 단발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단발머리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유미의 세포들>의 구웅이나 <슈퍼밴드>의 케빈 오 같은. 앞머리를 귀 밑까지 치렁치렁 흩날리며 내 안의 야수성을 깨워내거나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며 절제된 남성미를 뽐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귀차니즘과, 여름의 폭염과, 주변 이들의 만류가 겹쳐져 결국 시도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랬다. 남자의 거지존은 귀부터 발끝까지라고. 머리카락이 귀에 닿는 지점부터 기르면 기를수록 거지같음이 보태지는 것이다. 턱을 넘어도, 쇄골에 닿아도, 어깨를 지나도, 거지존은 계속된다. 야수성과 남성미는커녕 거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 자명한 이치를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태 방황 중이다. 이왕 마음먹은 거 파마를 해서 조금 더 길러볼까. 귀찮은데 그냥 잘라버릴까. 이러나저러나 올해도 단발은 실패다. 엊그제는 우리 집에 놀러 온 조카(여, 5세)에게 슬쩍 물어봤다. "삼촌이 있잖아~ 시현이만큼 머리 기를까 하는데~ 어떨 것 같아?"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별로일 거 같은데요" 5세의 음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아, 동심은 때론 너무 잔인하다.
올해의 지출- 취미활동
올해는 적금이 만기 되어 모든 빚을 청산했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허탈함이 컸다. 2년간 아껴가면서 모아도 별 거 없구나. 그래서 올해는 대놓고 소비하기로 작정했다. 오로지 나에게. 오랜 시간 정승같이 우직하게 모으고 나면 또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개같이 쓰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렷다. 저축의 부작용이자 반작용 같은 그 마음을 핑계 삼아 그간 도전해보고 싶었던 취미들을 맘껏 탐닉했다. 첫째, 도자기 수업. 물레로 도자기를 빚는 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짜릿한 고요'다.빙글빙글 천천히 도는 물레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동시에 굉장히 높은 경지의 몰입을 필요로 하므로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때 만든 밥공기와 접시들은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다. 무얼 담아도 담음새가 보기 좋다는 점이 도자기의 특장점. 둘째, 가죽 공예. 세세한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신경 써야 해서 난도가 높은 편이지만,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요즘은 엄마에게 선물할 지갑을 만들고 있는데, 최고급으로 하느라 가죽 값이 삼십만 원 들었다는 건 안 비밀. 이 뿐만 아니라 지금도 꾸준히 여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축구, 러닝, 피아노, 보이스 트레이닝 등등. 이제 딱 백일 후면 사회로 나가니까 전공 분야에 오롯이 힘을 써야겠지. 암, 그래야겠지. 주륵.
올해의 어플 - 브런치
내 글쓰기의 역사는 올해 3월, 아주 우연하게 시작한다. 심심할 때 독후감이나 기록할 요량으로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던 것이 단번에 통과되면서. 그전까지는 한낱 일기나 쓸 줄 알았지 각 잡고 완결된 글을 써 본 적 없었던 내게 초시 합격은 그 자체로 영광이었다. 나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양 들뜨기까지 했다. 하지만 초심자의 행운은 딱 거기까지. 열심히 써도 별로 늘지 않는 구독자와 바닥을 치는 조회수에 이제껏 빌빌대고만 있다. 가끔은 약이 올라 이깟거 때려치워야지 하다가도, 글쓰기가 선사하는 소소한 쾌감 때문에 그만두지도 못한다. 어찌 보면 글쓰기는 배설 행위와도 같다. 오랜 변비 같은 창작의 고통을 견뎌내면 결국 발행 또는 탈고란 해소의 순간은 당도하나니. 그렇게 끙끙대며 만들어낸 것이 고작 똥이란 점도 비슷하다. 지금은 똥글이나 북북 싸는 처지지만, '잘 싸는 사람'에서 점차 '잘 쓰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이든 성과를 보려면 1년은 해야 한다는 명언을 새기면서 앞으로도 계속 쓰기로 한다. 내년의 어워드에는 '올해의 잘한 일'로 기분 좋게 글쓰기를 꼽을 수 있기를. (점을 보러 갔는데 대뜸, 2023년에는 책을, 그것도 에세이집을 출간하게 될 거니까 그때까지 꾸준히 쓰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오호호.)
2019년이 다 갔다. (늘 그렇듯) 새해라고 해서 좋은 일만 가득하거나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돌아오는 2020년에는, 남들과 비교하느라 소중한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지 않고, 문득 외로울 때면 기댈 만한 곳이 항상 곁에 있으며, 가끔 오는 행복한 순간들을 더욱 촘촘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두 해피 뉴 이어.
(2019.12.31)
변변찮은 글임에도 구독까지 해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시는 독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응원이 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