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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Dec 20. 2019

셀기꾼들에게 고함

누구냐 넌



누군가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사기의 민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취업사기, 금융사기, 보험사기 등 수법은 다양하지만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기의 종류는 '프사기(프사+사기)'다. 지인이 주선해준 소개팅에 사진 한 장만 달랑 믿고 갔더니 완전 낯선 사람이 나온 경험은 다들 한 번쯤 있을 테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필 사진이 각자 다 다른 사람인 경우도 허다하다. 카메라 어플의 발전은 우리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가.

누구냐 넌. 도대체 누구냐.

보정 기술이 더욱 교묘해지고 치밀해진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가장 큰 폐해는 그 편리성에 기반한다. 예전에는 그런 작업들이 선 촬영 후 보정,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버스 뒷자리나 강의실 뒤편에서,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면서. 꼼꼼히 피부 톤을 정하고 얼굴을 다듬는 그들의 조용한 분투에서는 일종의 인간미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다. 촬영과 동시에 자동 보정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잡다한 노동이 생략되면서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윤리의식마저 덩달아 소거되었다는 점이다. 조심스레 턱을 깎으면서도 이건 너무 딴판이 아닌가, 동공을 키우면서도 이건 너무 어색하지 않은가, 스스로 비판하고 검열하던 자아는 이제 죽어버렸다. 원클릭의 세상에 죄의식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리하여 현재는 사진 보정의 아노미 상태. 기본으로 턱이 반쯤은 썰려나가고 허리께의 시공간이 자유자재로 왜곡되는 세태 속에서 사람들의 SNS 사진은 점점 기괴해진다. 이쯤에서 다시 돌아와 질문. 소개팅 상대의 프로필 사진이 다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면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까. 가장 잘 나온 사진? 가장 못 나온 사진? 그것들의 평균치? 정답은 none of them이다. 현혹되지 마라. 진실은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그럼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짝을 찾아야 하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일찍이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요컨대 한 사회의 신뢰 수준이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름한다는 것이다. 아, 셀기꾼과 프사기가 팽배한 작금의 한국이 선진 국가로 들어서는 일은 얼마나 요원한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 자본’의 차이다.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 것이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각종 계약·거래와 관련한 불신(不信) 비용이 적어 효율이 높아진다는 설명이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다양한 거래에서 나타나는 비용이 줄어들고 예상치 못한 손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한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위험회피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한국경제 <다시 읽는 명저> 칼럼에서 발췌)


놀랍게도 둘은 동일인물이다. 장성규를 좋아하지만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타인에게 멋지고 예뻐 보이려는 욕망을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3D가 2D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왜곡은 필연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심오한 질문을 늘 품고 있을 순 없다 하여도, 적어도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변별할 수 있는 이성은 갖춰야 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최소한 '이건 내가 아닌 것 같아' 말할 수 있는 양심은 남아있어야 한다. 객관성이 결여된 존재에게 미래는 없고, 개인의 양심이 마비된 사회가 번영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까 누군가 셀카를 찍을 때 자연스레 어플을 켜거든, 살쾡이처럼 날쌔게 그의 폰을 낚아챈 뒤 짐짓 거룩하게 외쳐라. '너 자신을 알라'. 사회의 신뢰는 구성원의 자정 노력으로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한 철학적 자아의 탄생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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