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점에 나는 교양 수업을 두 개 듣고 있었다. 영어회화 수업과 글쓰기 수업. 영어 수업에는 짝을 지어서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미션이 있었고, 글쓰기 수업에는 종강 전까지 자유주제로 에세이를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영어 수업 첫날, 어떤 여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종종 짝이 되어 만났고, 비록 짧은 시간과 짧은 영어였지만 꽤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서로 이웃한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우연한 사실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학번과 나이가 같았고, 음악 취향이 비슷했으며, 집도 바로 근처였다. 한창 낭만에 사로잡혀있었던 나는 금방 운명론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등굣길 지하철에서 너무 자주 마주쳤다. 황용식에 버금가는 직진남이었던 나는(믿거나 말거나), 에세이 과제의 주제를 이렇게 정했다.<관찰 일기>.
관찰 대상은 두 가지였다. 당연히 첫째는 그에 대한 것. '눈이 크고 매력적이다.' '오늘 보니 걸음걸이가 씩씩하다.' '몰랐는데 코끝을 찡그리며 웃는 버릇이 있다.' 등등. 둘째는 내 감정에 관한 것. 연락을 시작했을 때의 내 순수한 호기심부터, 너무 차분하고 도도하던 그의 반응에 대한 격렬한 조바심까지. 가끔 과제를 묻는 사이에서 같이 과제를 하는 사이로, 그러다가 함께 맥주도 한 잔 하는 사이로 진전될 때마다 속으로 외쳤던 쾌재와 환호들까지.
제출 기한을 며칠 앞둔 날, 나는 그 글을 마무리한 뒤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글쓰기 과제 검토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를 바래다주면서 아파트 앞에서 A4 3장에 달하는 그 레포트(겸 고백편지)를 건넸다. 레포트의 정체를 모르는 그는 천진한 얼굴로 인사하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는 속으로 그가 얼마나 놀랄까 기대하면서 답변을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에게 문자가 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날부터 사귀었으나, 두 달이 채 못 가서 나는 지독하게 차였다. 왜 그랬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나의 정성스럽고 느끼한 재롱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준 거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마음에 솔직하게 이별을 고했으리라. 나의 진심 앞에서 모질게 행동하기 어려워 일언반구도 없이 잠수를 택했으리라. 잠수 이별 앞에서는 누구도 무엇을 어찌할 수 없다. 천하의 용식이도 그럴 것이다.
이제 와서 그를 책망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감사한다. 그가 준 '방향이 틀린 직진은 정지 상태만 못한 것'이라는 깨달음은, 스무 살 무렵의 나에게 아주 커다란 교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잠깐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뒤로 아주 아름답고 바람직한 연애를 했다.)
이젠 그의 이름도 얼굴도 다 기억나지 않는 마당에,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손동작으로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던 내 모습만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나는 어쩌면 그 오글거리는 고백을 그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몇 번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내 마음을 몽땅 담아줄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가 고장 나서 그러지 못하고 지지리 궁상일까. 요즘 나는 사랑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 쓸데없이 희망적이고 어딘지 어수룩한 남자애가 가끔 그립다.
(2019.12.05)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황용식. 하지만 세상에 용식이는 없다. 드라마에서 빠져나오시라 우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