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re Dec 01. 2019

백만 원짜리 수학여행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백 엔이 한 천칠백 원쯤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유례없는 엔고의 시대, 오사카로의 수학여행을 기획하는 정신 나간 고등학교도 있었다. 그렇다. 당시 나는 새파란 고1이었다. 참가비만 120만 원에 육박하는 수학여행 통지서와 가파른 환율 그래프를 번갈아 보며 열일곱의 나는 탄식했다. 이 시국에 일본이라니. 고작 나흘에 백만 원이 넘게 필요하다니. 나는 그때 이미 백만 원의 가치를 너무 알고 있었고, 그에 반해 빤한 집안 사정을 등지는 법은 알지 못했다.

아직도 오사카는 가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여행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나서서 가도 된다고, 보내줄 수 있다고, 열 번은 물어보고 권유했다. 하지만 백만 원의 가치를 아는 나에게 그 여행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진심으로 내키지 않았으므로 나를 위로하거나 설득하려 드는 것이 퍽 이상했다. 가봤자 애들이랑 몰래 맥주나 사 먹겠지. 재미없는 투어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끌려다니기나 하겠지. 시시콜콜한 추억 쌓기에 쓰긴 백만 원은 너무 큰돈이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이제야 정주행 중이다. 거기서는 48만 원짜리 전지훈련을 가지 못하는 여덟 살 필구가 나온다. 48만 원이면 엄마가 돼지 두루치기를 오십 개는 안 팔아도 되지 않냐며, 어차피 그런 훈련 가지 않아도 야구는 내가 제일이라고 당돌하게 소리치는 꼬마. 나는 여덟 살 필구에게서 열일곱의 나를 본다.


나는 필구 같은 아이들을 잘 안다. 그런 아이들은 마음속에 저울을 지니고 산다. 저울의 한쪽엔 늘 '현실'이 무겁게 올려져 있다. 저녁 늦게 퇴근하는 아버지의 그늘진 얼굴, 학비나 생활비 고지서에 어김없이 동반되는 엄마의 한숨 같은 것들이. 저울의 반대쪽에 놓이는 것들은 그에 반해 아주 좀스럽고 잡다한 것들이다. 첫 수학여행, 새 축구화, 새 옷, 비싼 간식들 등등. 그것들은 상상 속 이미지로써 존재하는 반면 현실은 4D로 줄기차게 상영된다. 저울은 뒤집어지는 일이 없고, 아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씩씩해진다.


필구를 보면서 마음이 먹먹했던 것은, 그러면서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 것은, 그 씩씩함과 의연함 때문이었다. 혼자만 수학여행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비싼 추억 쌓기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또래 집단을 자발적으로 벗어나는 파격이 실제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게, 그 나이에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었다는 게, 나는 이제 와서 뒤늦게 짠하다. 어디 바닥에라도 굴러가면서, 몰래 지갑이라도 뒤져가면서 법석을 떨지 못하고, 너무 침착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인정해버린 어린 필구와 내가.   




고작 필통을 놓고 두 번씩이나 뜸을 들이곤, 꼭 사줄 필요는 없다고 금세 말을 바꾸던 꼬마가 있었다

극 중에서 어른들은 필구에게 말한다. 너는 여덟 살 답게 살라고. 그냥 실없이 오락이나 하고 돈가스나 먹으러 다니라고. 하지만 이미 쏜 화살이 돌아오지 않듯 이미 철이 나버린 아이는 그 전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나는 안다. 48만 원의 크기를 셈할 줄 아는 여덟 살 꼬마는 복잡한 마음으로 환율 그래프를 뒤적거리는 열일곱이 될 것이다. 값나가는 물건을 살 때마다, 혼자서 푸짐한 메뉴를 고를 때마다 여전히 품 안의 저울을 꺼내는 어른이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필구를 만난다면, 도로 어린애처럼 행동하라고 타이르는 대신, 너 정말 애썼나 하고 등을 두드줘야겠다.



(2019.12.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