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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Nov 21. 2019

가장 완벽한 프러포즈란



고백이란 이 시대에 얼마나 간편해지고 싱거워졌나. 진심을 전하기 위한 절절한 고백보다는 관계를 규정짓위한 선언적 고백이 횡행한 지금 이 시대. 뜨거운 마음을 건네던 낭만, 암묵적 통과에 가까워진 금. 나 역시 그런 유행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순정이 남아 있다면 바로 '프러포즈'에 관해서다. 고백의 가장 끝판왕 격인 청혼만은, 진정한 고백의 형태, 즉 '예고편 없는 본편 상영의 법칙'을 따라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결혼이 단지 둘 만의 일이 아니고, 프러포즈가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단 앞으로의 수많은 고비를 예고하는 음산한 서막에 가깝다고 해도, 평생을 함께할 이에게 그 순간만큼은 정확하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최대한 비밀스럽게 준비해서 청혼을 하고 싶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우리 엄마도 당신네 엄마도 모르는 어떤 순간에. 당신 몰래 근사한 반지를 맞춰놨다가, 느낌이 온 바로 그 순간에 즉흥적으로 말이다. 다소 로맨틱하지 않을 순 있어도 진실되긴 할 것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나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기혼자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미리 합의되지 않은 청혼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했다. 모든 교섭과 협상 과정이 끝나갈 때쯤 떠밀리듯 찬스가 온다고 했다. 실제로도 결혼 일정을 다 잡고 난 뒤 해치운 경우가 대다수였다. (장소와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다시 한 선배도 있었다) 그렇다고 프러포즈를 성심성의껏 하지 않으면 끔찍한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고도 경고했다. 그래, 수상자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어도 시상식은 치러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둘만의 시상식에서 수상자는 얼마나 무안할 것인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척을 해야 하나(백이면 백 눈치는 다 챈다고 한다). 잔뜩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쥐어짜내야 하나. 그럼 시상자는 또 얼마나 떨릴 것인가. 어떤 타이밍에 반지를 꺼내야 하지. 혹시 시큰둥하면 어쩌지.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마무리하지. 그런 상황을 떠올리자 나는 왠지 두려워졌다. 나도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내게 순수한 고백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상호 합의 하에 결혼을 약속하고 이미 상견례까지 마친 사이에, 애인이 그럴듯하고 형식적인 프러포즈를 넌지시 종용한다면. 나 역시 수많은 기혼자 선배들처럼 뻔히 보이는 역할극을 기획/제작하고 배역까지 소화해야 하는 것인가.

청혼 개노답 삼형제 1. 거대한 인파 속 공개 프로포즈 2. 음식에 반지 숨겨놓기 3. 차 트렁크 속 풍선의 습격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나는 대신 이런 다짐을 해 본다. 비록 그 당면한 요구에 굴복하겠지만,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심을 행위예술로 승화시키고 말리라. 강남역 10번 출구 또는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어떤 대로변에서. 난데없이 터지는 팡파르 속에서 나는 비장하게 무릎을 꿇고. 갑자기 백여 명의 행인들이 철 지난 가요에 발맞추어 플래시몹을 하고. 하늘엔 경비행기가 철자가 틀린 플래카드(Will you Merry me?)를 매달고 날아다니는. 흡사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YES라는 우렁찬 대답으로 관중들을 탄복시킬 때까지 끝날 줄 모르는 퍼레이드 속에서. 청혼 '당하는' 주인공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어야 할 것이다. 모 아니면 도, 나의 프러포즈 계획에 중간은 없다.


(2019.11.21)



살면서 목격한 가장 파격적인 프러포즈이렇다. 어동호회 팀과 축구시합을 진행하던 어느 주말. 경기 막판 상대팀의 한 선수가 안간 '악' 소리를 내며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그가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 경기를 지켜보던 그의 애인이 걱정된 발걸음으로 뛰쳐나왔고, 그녀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던 그 찰나, 능숙하게 무릎으로 돌아앉아 반지를 건네던 남자. 띠용. 비록 땀으로 얼룩진 상태였지만 우리도 축하의 박수를 아낌없이 쏟아냈고, 분주하게 움직인 팀원들 덕에 어느새 인의 품엔 장미 꽃다발까지 안겨있었다. 스무 명 넘는 사내들의 엄정한 입맞춤 요구에 마지못해 키스를 하던 그 커플. 그들은 지금 잘 만나고 있을까. 무엇보다 그 남자의 여생은 안녕할까. 빨간 장미와 초록빛 운동장의 보색효과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부디 그것이 청혼은 아니었기를. 100일이나 200일이나 어쨌든 평범한 이벤트였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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