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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Nov 11. 2019

어떤 말 못 할 고민



언젠가 이국의 거리에서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이들을 보고 다짐했다. 내 반드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리라. 죽기 전에 저런 현란한 연주를 꼭 해보리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음악에 관한 열망은, 간간히 나를 건반 앞에 앉힌다. 하지만 이내 나의 뻣뻣한 손과 저주받은 박자 감각을 실감하고 금세 맥이 풀리고 만다. 건반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나는 머쓱해진 손가락을 위해 클래식 리듬게임을 켠다. 여덟 개 건반의 리듬게임 속에서는 나는 꽤 멋진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 피아노뿐 아니라 나는 많은 부분을 타협하며 산다. 원체 욕심은 많지만 그럴 능력은 없기 때문에. 차오르는 욕망들을 대체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창작에 대한 욕구는 넘치지만 등단할 재능은 없으므로 브런치에 글을 끄적댄다. 근육 빵빵 몸짱이 되고 싶지만 가슴살 말고도 맛있는 게 많으므로 그냥 현상 유지에 만족한다.


창피하게도 나는 매양 이런 식이다. 거창한 이상을 꿈꾸지만 어느 순간 현실에 드러눕는 것. 편하게 드러누워서 나는 먼저 감사한다. 이렇게 폭넓고 간접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니. 포기하면 편하다더니 정말 그렇네. 얄팍한 감사는 값싼 자기 위로로 나아간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는 게 어디야. 닭은 커녕 참새도 못 잡는 사람들 천지인데. 그러다가도 어김없이 성찰의 시간은 온다.




최근 어떤 강연을 들었다. 연사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장이었다. 그는 확실히 비범했다. 우직함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그러했다. 삶의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 몇십 년 외길을 걸은 끝에, 그는 마침내 어딘가에 당도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퍼포먼스는 군더더기 없이 차분했고, 정교하고 우아했으며, 한마디로 완벽했다.


그 후로 나는, 대체재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성취의 영역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예컨대 매일 몇 시간씩, 거르지 않고, 무언가를 해내는 일. 어떤 변화나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그저 묵묵히 기계처럼,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는 일. 그런 따분한 일상이 지겹도록 반복되다가, 아 여기까지만 하고 포기해야겠다 할 무렵에, 아주 티끌만한 가망을 발견하는 일. 또 속을 걸 알면서도, 그 한 줌뿐인 희망에 안도하 아주 익숙하게 몸을 일으키는 일.


그리고 그런 일들을 이겨내고 기어이 무언가를 달성해낸 사람들 앞에서, 나는 복잡한 마음이 된다. 저이의 성취는 지금의 번듯한 모습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을 건너왔을까, 그의 지난날들에 혼자 뭉클하다가, 자신과 똑같은 노력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를 한껏 우러러보다가, 문득 누가 나에게 묻는 것만 같다. 너도 이렇게 할 수 있냐고. 삶을 온전히 한 곳에 투입할 수 있냐고. 손쉬운 안주와 당장의 평온을 모색하지 않고, 비로소 특별해질 수 있냐고. 결국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냐고.


그러면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든다. 그들의 성공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나를, 내가 타협해온 삶들을, 죽비로 내리치는 것만 같다. 삶이란 게 원래 각자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짊어지고 사는 것인데, 어떤 삶이 특별히 위대하다고 해서 그 밖의 다른 삶이 모두 하찮아지는 것은 아닐 텐데, 그들 앞에서면 나는 한없이 자질구레해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새로이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지, 훌훌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초심으로 시작해야지 싶다가도, 그러기엔 내가 너무 때묻어 버리진 않았나,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기엔 나는 특출나지도, 우직하지도 못한데. 나는 나의 자존을 어떻게 세울 수 있나. 나는 그렇게 이상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한다. 그 진폭은 점점 커져 갈수록 두려워지고. 오늘도 너무 많은 '그러기엔'과 '그럼에도'가 싸우는 밤. 아마도 고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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