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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Oct 27. 2019

우리의 죄는 멍멍

반려동물에 대하여



태풍이 불던 날 관사 문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푸들 한 마리를 구해준 적이 있다. 나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람에게도 냉정한 편인데도 그날 그 녀석의 처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하룻밤 불편이었지만 녀석에게는 생존의 문제였으므로. 폭풍우 속 이렇게 작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종족들인가 분개하며 그 녀석을 데리고 들어왔다. 서툰 손길로 씻긴 뒤 수건을 깔아서 잠자리를 마련해주니 새근새근 잘도 잤다.


1. 코고는 강아지는 처음 봤다 2. 아침에 침대맡을 두드리며 나를 깨우는 녀석

며칠을 기다려도 (역시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어렵게 찾아간 보호소는 나를 더욱 절망케 했다. 족히 스무 마리가 넘어 보이는 개와 고양이들이 제 몸 크기만 한 케이지에서 먹이와 배변과 함께 뒤섞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냄새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녀석들의 흐리멍덩하고 총기 없는 눈빛이었다. 그건 도무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일주일간 아무도 찾지 않는 경우 안락사를 당한다고 했다. 혹시 운 좋게 입양자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순종 암컷 강아지의 경우 업자들이 데려가 가둬놓고 '출산 기계'로 쓴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가차없이 유기하는 쪽과 잔인하게 착취하는 쪽 둘 중 어떤 부류가 더 끔찍한 지옥에 갈까.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얼른 그 녀석을 데리고 나왔다. 나까지 비정한 인간 대열에 합류할 순 없었기에. 그래서 그 작은 강아지가 인간 전체를 증오하도록 놔둘 순 없었으므로. 그렇게 꼬박 하루 동안 애견 카페를 들락거렸고, 몇 명의 후보 중 가장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과 맺어주었다. 왠지 몰라도 녀석을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퍽 쓸쓸했다.




최근 테드 창의 소설집 <숨>을 읽었다. 이번 신간에서도 그는 역시 날카롭고 독창적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진가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공상의 산물로 이미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장면을 비춰낸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라는 단편에서 도드라진다. 그 작품에서 작가는 반려동물을 대하는 현대인의 윤리의식을 서늘하게 겨냥한다.


작중의 세계에선 '디지언트'라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애완용 기계가 등장한다. 반려동물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한 디지언트는, 감정과 자의식이 있으며 인간의 언어까지 일정 수준 구사할 줄 안다. 이뿐만 아니라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넘나들고, 주인의 기호대로 겉모습을 커스터마이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성장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습성이 발달한다면 언제든 프로그램을 리셋하여 행동 특성을 교정할 수도 있다. 혹 아예 질려버린다면 전원을 끄는 것으로 손쉽게 그 관계를 끊어낼 수도 있다. 죄책감이 깃들 구석은 없다.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인공물이니까. 그리고 (부끄럽게도) 인간의 편리는 거기에 기인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 거울을 내려놓는다. 디지언트를 자유롭게 편집해도 된다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종료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취향에 맞게 동물의 품종을 개량하거나 필요에 의해 그들을 소유하고 또 배반하는 인간의 태도가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 질문하면서. 실은 그것이 바로 생명을 대상화하는 이기심의 단초임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것이다. 나는 몰입하며 소설을 읽다가 그날의 그 어두웠던 동물 보호소를 떠올리곤 문득 황망해졌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자신이 오랫동안 기르던 반려견의 안락사 소식을 고했다.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데려온 아이였는데, 성견이 되고 나서도 다른 인간들에 대한 공격성을 제어할 방도가 없었다고 했다. 꾸준한 약물 치료와 행동 치료로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보내주었다고 했다. 그녀가 반려견과 함께한 커다란 세월을 모르지 않는 나는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건넬 만한 위로는 너무 빈약하게만 느껴졌기에 나는 입을 다물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 귀여운 아이가 보여줬던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어디서나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열성적인 책임감이, 인간 사회라는 좁고 옹색한 곳에서 받아들여지기엔 지나치게 숭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 날쌔고 영리했던 강아지가 자신의 생애를 너무 답답하게 여기지 않았었으면 좋겠다고.


(2019.10.24)



내 친구 Emeri와 그녀의 영원한 단짝 Gigi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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