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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Oct 17. 2019

우리의 연애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내 나이 스물여덟. 또래 집단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김없이 연애라는 화두가 등장한다. 각자 원하는 스타일은 천차만별인데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갈수록 연애가 어려워진다는 점. 이십 대 중반이 넘으면 집단적으로 눈이 높아지는 병에 걸리는 걸까. 그 원인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았다.




1. 결혼이 가까워지는 나이, 뚜렷해지는 현실 인식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적 낙인을 부정할 수도, 그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는 나이 이십 대 후반. 지금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그리고 결혼 압박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가 나서서 압박하지 않아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더욱 까다로워지고 신중해진다. 이젠 누가 나 좋다고 덤벼도 설레기 전에 머릿속의 분석/검증 프로그램이 (무의식적으로) 먼저 돌아간다. '그냥 일단 만나볼까'는 위험하다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아는 탓이다. '그냥'과 '일단'이란 말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데었던가. 그 씁쓸한 뒷맛에 몇 날을 허탈로 뒤척였던가. 


2. 줄어드는 인적 네트워크, 기댈 곳 없는 개인


어떤 시점 이후로 우리의 인간관계는 점차 다양해지거나 확장되기보다 더욱 내밀해지고 협소해지는 길을 택한다. 사회적 자아의 효율적 생존을 위해서다. 기존 관계들을 유지 보수하는 데에 쓰이는 에너지도 상당한 마당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이미 그 자체로 도전이다. 소개팅이 나올 구멍은 진작 막혔고, 뻔한 인맥 속에서 뉴페이스를 만나기란 쉽지 않으니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자신과 타협해가며 기존 인력풀을 전면 재검토하거나, 자아를 소모해가며 미지의 가능성에 베팅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버거운 게 현실이지만.


3. 점점 확고해지는 취향, 희미해지는 포용력


연애에 있어서 가장 좋은 건 나 자신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된다는 점이다. 연인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는 나의 본성과 호오와 취향을 확실하게 체득할 수 있다. 그건 자아 성찰이라는 측면에서는 꽤 바람직하지만, 로맨스에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부작용이 있다. 연애가 끝나면 복기와 오답노트를 통해 몇 개의 허들을 추가하고, 그렇게 확립된 취향은 갈수록 굳건해져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예컨대 다섯 개의 특장점과 한 개의 '나를 돌아버리게 만드는' 단점을 가진 상대가 있다면 어떨까. 당신은 쉽게 그를 선택할 수 있을까?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는 장점에 매료되기보다는 단점을 회피하도록 변모한다. 아마 그게 경제학적으로진화생물학적으로도 합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땐 비포 시리즈 중 1편이 제일 좋았다. 이젠 3편이 제일 좋다. 살벌하고 구질구질해서. 현실적이라서.


4. 소통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 (이건 나에게만 해당할지도) 


예전엔 그런 말을 믿었었다. 나에게 완벽히 맞는 반쪽이 있을 거라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반쪽은커녕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와 완벽히 포개어질 수 없다고.


예를 들어, 모두 각자의 집이 있다고 치자. 우리는 그 공간 안에서 자유롭고 편안하다. 문제는 우리가 혼자서 행복하기보다는 타인의 집을 궁금해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이다. 그러나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겨우 그 집 내부를 엿볼 수 있다. 상대의 집에 들어가거나, 억지로 창문을 넓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내 공간을 맴돌며 창문을 기웃댈 뿐이다. 우리의 소통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마음을 직접 꺼내 보여줄 수 없기에 언어라는 창을 내서 의미를 주고받지만, 번번이 추상적이고 파편적이며 그래서 무기력하다. 어쩌면 가장 긴밀한 관계에서도 그렇다. 아무리 진득하게 대화해도 진심은 전달되기 어렵고, 아무리 섬세하게 표현해도 상대에겐 조악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소통은 끊임없는 유추와 해석의 과정이므로 필연적으로 오해와 짐작이 개입한다. 상보적 관계를 꿈꾸지만 현실은 항상 구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소통의 본질적 한계와 두 사람의 진실된 결합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연애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와우. 이렇게 부정적인 얘기만 늘어놓고 나니까 더욱 암울해진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백마 탄 왕자님 (또는 건물주의 막내딸)의 환상에서 벗어나버린 우리는. 평범하게 만나서 담백하게 사랑하는 일이 실은 거창한 바람이었다는 걸 깨달아버린 우리는. 연애가 우리를 소모하고 우리가 연애를 소진하는 광경을 많이도 목격해버린 우리는. 아무래도 이 글의 긍정적인 결론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으니, 오늘은 이쯤 하고 소주나 마셔야겠다. (사실 해결책을 제시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하)



(2019.10.16)



함께 읽을 책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지음, 2019.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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