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하고 방탕하기를
<나를 견디는 시간> 그리고 '완벽한 날들'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추천하는 책이 있다. 브런치를 통해 접한 작가님의 첫 작품이라서 그런지 뭔가 애착이 간다. (물론 그는 나의 애착을 알 리 없지만) 제목부터 뭔가 애틋한, 이윤주 작가의 <나를 견디는 시간>이다.
그의 글을 처음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의 글 뭉치는 이미 브런치에 있는 좋은 글들 중에서도 유독 나의 취향을 정확히 관통해냈다. 한달음에 읽어 내려가면서, 이건 아껴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너무 많은 좋아요나 댓글은 왠지 그에게 스팸이 될 것 같아 주춤하다가, 순수한 팬심이란 이렇듯 상대를 바닥부터 염려하는 일인가, 새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글쓰기 강의를 듣는다면 이 분에게 듣고 싶다고.
장면을 디테일까지 분명하게 묘사하는 섬세함, 인용과 비유를 우아하게 구사하는 센스, 산문 같다가 가끔은 시의 한 구절 같기도 한 마무리까지 모두 훌륭하지만, 내가 가장 반한 부분은 그가 문장을 대하는 태도였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단어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그의 고집을, 낱말을 능숙하게 선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그의 꼼꼼함을 말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사전을 앞에 두고 고심하는 뒷모습이 떠오른다. 써지지 않는 글을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베개에 머리를 누이면서도 한 문장 때문에 뒤척이는 새벽이 그려진다. 그런 작가정신 앞에서 나는 공손해진다.
가끔은 수식과 서술이 무겁게 느껴지는 일도 있지만, 그래서 술술 읽히기보다는 꼭꼭 짚어가며 삼켜내야 하지만, 그것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 된다. 그의 문장 속에서 그간 잊고 지내던 아름다운 부사어들과 만나 반가웠고, 상투적 표현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대체한 그만의 어법을 보고 감탄했다. 덕분에 짧고 뭉툭한 SNS의 언어에 오염된 마음이 조금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TMI를 덧붙이자면, 이 책을 구매한 것은 속초의 한 독립서점에서였다.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공존하던 그곳. 주인과 그의 어머님으로 보이는 분의 손놀림이 분주하던 그곳. 책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매달 직접 발간하는 서점 소식지까지 구비된 그곳에서, 나는 그런 정성들이 감격스러워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여행에서 만난 그 작은 서점을 후원하고 싶은 마음과, 내가 팔로우하는 작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더해. 이처럼 물건을 사는 일이 단순히 대가를 지불하는 일을 넘어서 구체적 존재를 응원하는 일로 느껴질 때, 소비하는 일은 더없이 후련하고 뿌듯하다. 그럴 때면 나는 기꺼이 헤픈 사람이 된다.
대형 서점에선 책 냄새가 난다. 독립 서점에선 주로 사람 냄새가 난다. 속초 '완벽한 날들'. 좋은 글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와, 그런 작가를 발굴해 책을 엮어낸 감각적인 출판사와, 큐레이팅을 게을리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작은 서점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독자로서 열렬한 감사를 전달할 방법은 작가의 문장 앞에선 공손하다가, 서점 매대에서 방탕해지는 일일 뿐일 테니. 오늘도 우리 모두 공손하고 방탕하기를.
(201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