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의 소설을 가장 과학적인 문학이라고 평가한다면,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과학한다는 것>은 가장 문학적인 과학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00쪽에 달하는 이 교양서적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말이다) 읽어 내려갔다. 저자는 멀미를 유발하는 이론과 수식은 제쳐두고 과학의 역사와 발달 배경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조망한다. 그 속에서 그가 논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 그 자체라기보다는, 과학이 기본값이 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철학적 태도이다. 그리고 다소 두꺼운 이 책이 문학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특별히 유려한 문체와 사변적인 질문들 덕분이다. (무엇보다 옮긴이의 역할이 컸다)
인간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둘 사이를 쉽게 오간다. 한쪽 세계에서 우리는 사실과 데이터를 중시한다. 다른 쪽의 세계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괴로워한다. 특히 인생을 즐기는 순간에 우리 몸의 유전자적 구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관심도 없다. 이쪽 세계에서 우리는 과학을 추구한다. 저쪽 세계에서 우리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시를 읽는다. 전자의 세계에서는 정보를 구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p.33)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질문.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또한 매력적인 점은, 과학을 절대적 진리로 인식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이다. 그는 과학자이면서도 과학의 약점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과학의 굳건한 성벽을 열어젖힌다. 과학 역시 확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숨기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불가해한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학과 예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대의 세계관 전체는 자연법칙이라는 것이 자연현상의 설명이라는 착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사람들이 신과 운명이라는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만족해 머물러 있던 것처럼, 현대는 자연법칙에 만족해 머물러 있다. (p.97)
-> 종교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러다임이었듯이 과학 역시 지금 시대를 가로지르는 패러다임인 것이다.
과학의 영역에서 실험실에서 행하는 모든 방법은 환원론(데카르트적 분석 방법)이다. 과학에는 다른 방법론이 없다. 따라서 생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면 환원주의적인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설사 우리가 과학적 행위를 위해 환원론이라는 방법을 선택해도 이 방법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연구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힐 수 있고, 환원이라는 방법을 통해 얻은 아주 세부적인 정보들 속에서 정작 지향하던 목표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p.273)
-> 예컨대 연구실에서는 세포를, 유전자를, 핵산을, 또는 더 미세한 무언가를 대상으로 인과관계를 탐구한다. 하지만 그 인과율이 유기체로 확대되었을 때에도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다(아닐 확률이 높다). 예컨대 암의 유발요인이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 할까?
1900년 이후 과학이 전개된 양상의 특수성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엄정한 연구의 영역에서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 새로 발견되었다. 빛의 성질도 전자의 위치도 모두 단순한 사실로는
탐구될 수 없다. (p.454)
-> 사실 세계는 모순 투성이다. 빛이 파동으로도 입자로도 존재하는 것처럼.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특정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세계도 미시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원하던 회사에 취직함과 동시에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여자의 마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규명할 수 없는 것처럼.
원자처럼 유전자도 이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유전자는 분자인 동시에 정보다. 분자로서 유전자는 분명 물질이지만, 정보로서 유전자는 비물질적이다. (중략) 원자와 유전자를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상징이 바로 우리 내부에 들어 있기도 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기도 한, 아직 풀리지 않은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어떤 창문 구실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창문을 통해 우리 모두는 새로운 지식의 전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p.461)
지금 시대의 과학은, 너무 자명해진 나머지 은근슬쩍 생략되기도 하고, 너무 복잡해진 나머지 슬그머니 외면당하기도 한다. 어렵고 난해한 것들에 대한 기피 현상이 "이과 망했으면"이라는 새침한 집단적 소망을 낳기까지 했다. 하지만 목욕물이 아무리 뜨거워도 언젠가는 몸을 담가야 하듯, 세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과학과 만나야 한다. 당신이 아무리 빌어도 이과는 망하지 않고, 뻔뻔하게도 세상은 점점 통섭적 인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면, 과감히 일독을 권한다.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과학적 여정이 새로운 교훈을 줄지어다.
(2019.11.01)
<창비 주간 논평>에 실린 김태호 교수님의 서평을 첨부한다. 매끄럽고 깊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