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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Feb 12. 2020

[수플레] '닉값'하는 뮤지션, 권나무

ep.2 권나무 - 새로운 날

안녕하세요. 협업 매거진을 만들어보자는 동료 브런치 작가님의 제안으로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재밌고 참신한 기획을 해주신 보니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함께 글을 올릴 나머지 두 분의 작가님들께도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솔직히 처음엔 그를 조금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도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덥석덥석 사람을 잘도 믿을 것 같은 그. 운전할 때 끼어들기를 가장 어려워할 것 같은 그.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대뜸 '도를 아십니까'하고 말을 걸어와도 왠지 끝까지 경청할 것만 같은 그는, 세상 순박한 얼굴을 하고서 자기 얼굴보다 더 맑고 깨끗한 가사를 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것은 바로 꾸밈없는 그의 목소리다. 또박또박 정직하게 노래를 발음하듯 부르는 모습이 아무래도 촌티가 팍팍 나는데, 아무리 봐도 요즘 시대 감성은 아닌데, 요상하게 마음을 정돈해주는 매력이 있다. 그의 노래 몇 곡을 소개한다.




새로운 날 (3집 수록, 타이틀곡)
너를 처음 만났을 때 / 마치 눈이 오는 것 같이 / 아무리 눈 비벼 봐도 / 온 세상이 하얗게 / 어제가 없었던 것처럼 / 뒤돌아 문을 닫고서 / 사람들 사이로 하얀 옷을 입고

비올라 선율이 특히 매력적인 곡. 나는 이 곡을 듣고 자신의 아이를 안아 든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내 아이. 하얀 배냇저고리를 입고, 하얀 꼬까신을 신고 마침내 내 품에 들어온 아기. 나의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땐 '아무리 눈 비벼봐도' 온 세상이 새롭고, '어제가 없었던 것 같은' 마음이 되는 걸까. '너에게 노래 같은 마음으로' 다가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걸까. 아이를 갖는다는 일이 커다란 도전이 되어버린 시대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버리는 경험을 노래하는 그. 그가 실제 이런 의도로 곡을 썼을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내 아이를 안게 될 순간이 온다면 머릿속에서 아마 이 노래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화분 (2집 수록)
처음 기르던 꽃들이 말라갈 때에는 / 난 이유를 알지 못했네 / 내 목을 축이고 남은 물을 줄 때엔 / 내 그늘을 넓히고 남은 빛을 줄 때엔 / 나는 피고 꽃은 지고 / 나는 피고 꽃은 지고 / 나는 살고 너는 살지 못하고 / 난 이유를 알지 못했네

유진목 시인의 '식물의 방'이라는 시(<연애의 책> 수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로, 내가 처음 그에게 반하게 된 바로 그 곡이다. '내 목을 축이고 남은 물을 주어서는', '내 그늘을 넓히고 남은 빛을 주어서는' 결코 꽃을 키울 수 없다고 말하는데, 따지고 보면 비단 화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를 가까이에 두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이기심이 앞서면 상대를 해치고 자기희생이 과하면 내가 파괴되고 마는, 관계의 적당한 거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오늘은 노래를 소개하는 날이니까.



 

이 밖에도 좋은 곡들이 더 많다. '사랑은 물과 같이 높은 곳에서 흐른다고' 읊조리듯 노래하는 '사랑은 높은 곳에서 흐르지'(2집), '튀김우동이 다 익을 때까지만 곁에 있어달라'며 재치 넘치는 요구를 하는 '튀김우동'(3집), '이맘때면 잠깐의 감기라도 나눠 앓자고' 묵념하듯 위로하는 '이천십사년사월'(세월호 추모 앨범 <다시, 봄>) 등등. 모두가 힙하고 새롭고 반짝거리는 음악을 찾는 세상에서 그는 오랫동안 묵묵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닉값이란 이런 것이다. 나도 닉값을 해야 할 텐데

그래서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유행 타지 않는 뮤지션'이고,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의 이름대로 그냥 '나무'다. 그 곁에 머무는 것으로 때때로 조용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가끔 오래 자리를 비운 뒤 돌아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그런 단단한 나무 말이다. 그가 이름을 닮아간 것일까 아니면 이름이 그를 담아낸 것일까, 나는 문득 그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찾아니 '나무'라는 예명은 김광석의 동명의 곡에서 따왔다고 하는데(아주 우연히 지었다고 하지만), 가사를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음악을 하는지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다.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 /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오 - 김광석, '나무'

정규 3집까지 나온 지금, 권나무는 포크라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깊숙이 내린 듯하다. 한국 대중음악상 포크부문에서 받은 두 개의 상이 "꾸준히 제 속도로 음악을 해나가도 된다는 격려"로 느껴졌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이제 나는 그 이름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권나무의 음악은 세월을 먹고 자라 어떤 가지를 내고 어떤 그늘을 까. 모르긴몰라도 아주 크고 넓을 것이다.   




얼마 전 방문한 LP바에서는 김창완이, 유재하가, 김광석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나는 손님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는데, 내가 노고지리의 '찻잔' 같은 오래된 노래를 신청하자 사장님은 '어린놈이 제법인데?' 하는 미소로 화답했다. 어쩌면 세대 통합은 불가능한 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대를 가로질러 모두아우르는 좋은 노래 한 곡이 있다면. 나는 대중음악의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가 대한민국 포크의 계보를 이을 것이라고 섣불리 장담할 순 없으나,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년 후의 LP바에선 그의 노래를 자주 만나게 될 거라고. 혹시 거기서 그의 노래를 신청하는 젊은이를 만난다면, 내가 그의 술값 정도는 기쁘게 내줄 수도 있겠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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