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D는 요리사다. 현 직장에서 주방의 실무 총괄급(sous chef)인 친구는 엊그제 모임 내내 업무 스트레스에 관해 하소연했다. 알바생이나 부하직원들 중 대다수가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정말 기초적인, 바보 같은 실수들 앞에서 D는 말 그대로 뚜껑이 열린다고 했다.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만도 했다. 특히, 사소한 실수로도 귀에다 고함을 치거나 팬을 집어던지는 이국의 주방에서 일을 배운 그로서는. 잔뜩 열이 오른 친구를 달래주긴 했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으론 직원들 편을 들고 싶었다.
나도 주방에서 막내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일을 좀 효율적으로 해라. 다음 일을 생각하면서 해라. 당시 나는 성실하고 열정적이었지만 눈앞의 작업에 급급할 뿐 일의 흐름을 읽는 법을 몰랐다. 헤드 셰프는 내가 간혹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면 매우 공격적으로 질책했다. 이것밖에 못해? 이걸 왜 몰라? 조금만 신경을 쓰고 조금만 생각을 더 하면 알 수 있다며 나를 닦아세웠다.그렇게 한 번 혼이 난 날은 크게 위축되어 다른 실수를 거듭하기 일쑤였다. 나도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돼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알 수 있는 것들, 예컨대 일의 시작과 끝을 파악하거나 내 작업이 이후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는 것, 업무의 경중을 파악하는 것.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 등은 실제로 조금만 신경을 쓴다고 알 수 있는 일일까? 글쎄. 숙련자에게 한 공기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은 비숙련자에겐 한 가마니를 소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숙련자는 비숙련자의 입장을 자주 간과하고 비숙련자는 숙련자의 잣대가 버겁기만 하다. 비숙련자가 이론을 이해했더라도 실제로 구현해내는 건 별개의 문제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잘하려고 의욕이 앞서는 경우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칠 수도 있다. 몇 번의 실수와 교정을 거쳐야만 일이 몸에 익고, 그렇게 체득된 이후에야 비로소 일의 개요와 요령이 보이기 시작한다.
운전을 예로 들어보면 이렇다. 초보자에게 운전석은 너무도 낯설고 속도는 빠르게만 느껴진다. 차선을 맞추는 데에 온 신경이 쏠리므로 사이드 미러나 백미러를 볼 여력 따위는 없다. 오로지 직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걸 지켜보는 숙련자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답답함에 시시각각 속이 뒤집힌다. 속력 좀 내. 사이드 미러 좀 봐. 깜빡이 켜야지. 와이퍼 말고 깜빡이. 브레이크 부드럽게 밟아. 아니 그것보다는 더 세게. 야 앞에 차!!! 사고위험이라는 커다란 리스크 앞에서 지도자는 날카로워지고 다급해진다. 주변에 외제차라도 있을라치면 평정심을 더욱 쉽게 잃는다. 안 그래도 잔뜩 경직된 초보자는 숙련자의 잔소리에 감정을 다치기 쉽다.연인 사이에 반드시 피해야 할 일로 '운전 연수'를 꼽는 이유다.
남자의 눈빛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에피소드. 스무 살 때 수학 문제의 풀이를 도와주는 학원 알바를 잠깐 했었는데, 무섭기로 금세 소문이 났다. 결코 순순히 알려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문제를 들고 오면 어디까지 풀었는지 또는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 꼭 설명하게 했고, 아예시도도 안 해봤거나 뻔한 공식을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엔그냥 돌려보냈다. 쉬운 실수를 반복할 때는 악역을 자처해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냈다. 어떤 중3 꼬맹이는 내가 피타고라스 정리를 어떻게 모를 수 있냐며 구박하자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모를 수도 있죠.." 그 말은 가슴에 박혀 나를 오래 괴롭게 했다.
조그만 학원에서는 내가 숙련자였지만, 드넓은 세상에서 나는 주로 반대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나 역시 꼴좋게 허우적댈 뿐이었다. 다만 운이 좋게도, 최근 새로 배우는 분야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그런 미숙한 나를 잘 이끌어주는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한결같고 부드러운 지도법에 나는 매번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반복되는 실수에도 인내를 잃지 않는 것은 물론, 몇 번이고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충분히 기다려준다. 수학 문제를 알려주던 옛날의 나처럼 답답한 티를 내거나 윽박지르는 일이 없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스스로의 무지와 형편없음에 좌절할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방울을 떨구던 꼬맹이가 떠오른다.
많은 경험을 돌고 돌아 이젠 안다.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아가지 않나. 또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얼마나 큰 자산이 되는가. 이 자리를 빌려 이젠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에게 사과를 전한다. 너를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네. 꼬맹아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