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주나 흘렀다. 이제 열흘 남은 제주 살이. 무언가에 흠뻑 집중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상대성 이론 나빠. 아인슈타인 미워..
바다는 마냥 포근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수영은 아무리 배워도 친해지지 않고,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들어가는 건 여전히 공포 그 자체다. 유년 시절 수영장에서 패닉을 겪었던 사건 탓일지도, 몇 번의 기흉 병력으로 내 심폐 기능에 대해 스스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해보고 싶어 물과 시간을 더 자주 가졌다. 때때로 스노클링을 즐기러 바다에 뛰어들거나 일부러 서핑 강습을 받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거기에 더해 야심 차게 프리 다이빙에 도전했다.
막상 해보니 이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매우 어렵기 때문) 강습 내내 주로 몸에 관한 기존 설정을 재조정하는 데에 시간을 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몸 전체를 이완하는 법. 그러면서 힘을 쓸 때에는 올바르게 힘을 사용하는 법. 모든 것은 숨을 참은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산소만 이용하는 효율적인 움직임이 중요하다. 동시에 물에 대한 심리적인 부분도 대폭 수정해야 한다. 숨을 참으며 때때로 밀려드는 트라우마를 물리치기. 최대한 편안한 생각으로 평정을 유지하기. 수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엄습하는 공포를 몰아내기.
그러나 몸이든 마음이든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평소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정작 물속에서 필요한 근육엔 힘을 쓰는 법을 몰랐고, 효과적으로 몸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나는 철저히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뭍에서 몸치는 물에서도 몸치라는 슬픈 사실. 거기에 더해 심리적인 컨트롤도 쉽지 않았다. 편안한 생각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편안한 순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 가장 편안했던가? 퇴근했을 때? 잠 자기 전에? 휴일 아침에? 여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내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편안한 순간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니, 퍽 슬펐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는 없다. 몸과 마음이 모두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것은 그동안 내가 잘 돌보지 않은 탓이다. 먹고사는 일이라는 핑계로.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안 게 어디야. (이래서 새로운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나 보다) 앞으로는 몸과 마음에 더욱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결국 모든 일은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무심하게 대했는데도 그간 큰 탈 없이 버텨준 몸과 마음에게 감사.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허리를 곧게 피고! 목 스트레칭 한 번 하시길!
제주의 카페들은 관광객의 유/출입이 잦아 책을 읽거나 무언가에 집중하기에 썩 좋지만은 않다. 그래도 간혹 그걸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공간이나 시간,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그날의 분위기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공간 속에 나 홀로 있는 것처럼 집중이 잘 된다. 매번 겪는 느낌은 아니고 온전히 우연한 사건이지만 일련의 공식을 유추해보자면 이렇다. 1. 맑은 하늘 자연광 아래, 2. 배경이 되는 잔잔한 바람 소리나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3. 알맞게 맛있는 커피 혹은 술. 물론 너무 핫플이라 인파가 쏟아지는 곳은 예외.
독립 서점에 종종 들른다. 대형 서점과는 구별되는 작은 서점만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서다. 음식점으로 치면 소규모 비스트로―프랜차이즈 식당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와인 리스트나 창의적인 페어링 메뉴 같은 걸 갖춰놓은―같아서 작은 공간일지라도 발견하고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각 서점만의 큐레이팅 방식이나 분류 기준 등을 엿보거나 때로는 책방지기의 취향과 색깔을 따라 기존 서점에서 접하지 못했던 책들도 기분 좋게 들춰보곤 한다.
모든 작은 책방들이 각자 다른 매력으로 톡톡 튀지만, 책 목록이 유독 맘에 드는 곳이 있긴 하다. 그런 점에서 하루 온종일도 있을 수 있겠다고 느꼈던 함덕해변 근처 만춘서점. 고 박완서 선생님의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과 식재료 에세이 <위대한 식재료>를 구매했다.
서쪽 끝 한적한 마을 한경면에 있던 무명서점. 정갈한 분위기에 앤티크 소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선 이슬아 작가의 <심신 단련>을 업어왔고.
꽤 오랜 시간 서점이 한적해지길 기다렸을 정도로 붐볐던 한림 책방 소리소문. 책 구절을 필사하는 데스크를 따로 마련해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선 김영민 교수님의 <공부란 무엇인가>와 고미숙 선생님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를 샀다. 책갈피와 yes24 매거진은 덤.
독립 서점에 들어가면 뭐든지 하나는 꼭 사서 나오자는 게 나만의 약속이다.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을 냉큼 지르거나 정 맘에 드는 책이 없으면 굿즈라도 몇 개 값을 치르는 식이다. 이 공간을 가꾸고 다듬는 정성을 생각하면 인터넷 주문의 편리함이나 합리적 소비는 조금 미뤄둘 수 있다. 기껏해야 이천 원 남짓의 차인데 조금 팬심의 의미로 쓰면 어떤가. 왜냐면 나도 언젠간 독립 서점을 하고 싶거든.
날마다 오가는 비행기를 관찰하고 있자면 점점 아련해진다. 이 곳을 떠나기까지 열흘이 채 남지 않은 까닭이겠지.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여기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들을 다 글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 놀면 놀수록 글을 쓰는 감각이 둔해져 많은 밤을 홀로 끙끙대고 있다. 그래도 남기고픈 요지가 있다면,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다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여러분도 할 수 있고, 꼭 해야 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당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그 문제―당장 붙잡지 않으면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회, 꼭 이겨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그런 목표―들도 결국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 굳이 억지로 붙들지 않아도, 잠시 미뤄두거나 혹은 아예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세상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점. 가끔은 용기 내서 기존 대열에서 이탈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 이러나 저러나 삶은 여전히,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사실. 누가 알려준 건 아닌데 몇 주간 유유자적하니까 어렴풋하게나마 알겠다. 팽팽 노는 거 합리화하는 거 아니냐고? 아ㄴ...아니야...아닐 걸..?
(202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