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드는 생각
12월!
한 해가가 저물어가는 시간이 되니 괜스레 바쁘다.
특히 마음이 바쁘다.
마무리 져야 할 일들과 이 사람 저 사람들과의 만남이 많다.
거기다가 병원예약까지 줄줄이 엮여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시간을 재촉하게 된다.
요즘은 하루가 너무 빨리 세어진다.
“오늘이 며칠이지?”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제일 많이 떠오른 말이다.
내가 준비될 틈도 없이 아침이 열리고,
머릿속엔 해야 할 일들이 밀려오고,
몸은 아직 눈을 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시간은 이미 한 발짝 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멀리 살고 있는 아들도 크리스마스와 자기 생일이 있는 12월을 맞아 집으로 오기로 했다.
들뜬 마음이다. 그래서 더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아들방도 청소하고, 이부자리들도 세탁을 해야 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재료들이며, 생일선물도 준비해한다.
머릿속으로 연말의 계획들을 세우다 보니 날짜와 시간들이 뒤죽박죽이다.
그러다 보니 실수는 이지당연(理之当然 )이다.
한 번은 관심 있는 무료 전시회가 있어서 아이폰 달력에 기록을 해 놓았다.
오랜만에 지인께서 안부 전화를 주셔서 무료전시회에 같이 가실의향이 있는지 물었더니 함께 가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당일날 전시회를 갔는데 , 전시회는 그다음 날 시작한다면서 전시장은 아직 작품 디스플레이로 분주했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죄송스러운 마음에 애꿎게 핸드폰의 스케줄표를 탓했다.
전시회는 못 봤지만, 오랜만에 지인을 보니 좋다시며 호탕하게 웃으시고는 점심까지 사 주셨다.
치과 예약도 그랬다.
목요일이 예약 날짜인데 수요일에 가거나, 화요일 미팅인데 월요일이 화요일인 줄 착각하고 컴퓨터 앞에서 기다리며, 왜 이들이 늦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마치 하루를 미리 당겨다 쓰는 느낌이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시간을 사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일까.
실수로 얼룩진 흘러가는 하루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나는 아주 조용한 선택을 했다.
그냥 하루를 먼저 살기로.
그 선택은 어떤 반짝이는 목표가 아니라,
나를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내일의 나에게 건네줄 작은 친절을 오늘의 나에게서 먼저 꺼내보는 것으로,
실수로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는 순간을 미래로 미루지 않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앞서간다’는 말을
빠르게, 바쁘게, 치열하게라는 뜻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하루 먼저 사는 삶은 그와 정반대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급함이 아니라, 여유를 더해가며. 시간을 앞질러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문 앞에 조금 일찍 도착해 문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하루 먼저 산다는 것은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일 일수도 있다.
해야 할 것들을 조금씩 건드려 두는 작은 움직임,
미래의 내가 덜 무겁게 일어날 수 있도록 지금의 내가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특히 현대는 더 그렇다. 우리의 계획은 종종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무너질 때도 있다. 그러나 하루 앞서 산다는 것은 엄격한 일정이 아니라 적응력에 관한 것이다. 만약에를 고려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의지, 그로써 놀라움에 당황이 아닌 회복력으로 맞서는 태도이다.
이러한 유연성은 준비를 불안의 원천에서 힘의 도구로 바뀌는 것이다.
어쩌다 하루를 먼저 살기 시작하자 내 삶의 속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예전에는 시간에게 쫓기며 하루가 나를 지나쳐가는 것 같았다면,
오히려 지금은 시간과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새벽이 아무도 깨우지 않은 채 스스로 찾아오듯, 나 역시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조용히, 나를 위해 내일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낼 뿐이다.
그렇게 하루를 먼저 살아보면 내일의 나는 늘 조금 더 가벼운 얼굴로 나를 맞게 된다.
하루를 먼저 산다는 건 반드시 생산적인 하루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더 충만하고 깊게 느껴졌다.
나는 안다. 내일도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마음이 붕 떠 있을 것이고, 어떤 날은 작은 일에도 흔들리고,
또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모든 게 버거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나는 하루 먼저 살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는 시간을 쫓던 사람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하루 전에 놓은 작은 다정함 덕분에
내일의 나는 늘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그 따뜻함 하나면, 오늘을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