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 피천득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백수 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처음 읽은 선생님의 글은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나의 사랑하는 생활'이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수필 '인연'.
‘당연히’ 돌아가신 줄 알았던 피천득 선생님을 뵌 것은 모두 세 번 샘터에서 일할 때 였다. 2000년 5월, 선생님의 구순연(九旬宴)때 나도 초대를 받아 갔다. 꽤 정정하셨고, 농담도 잘 하셨다. 많은 분들의 박수를 받고 연단에 서신 선생님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일제 때나 이승만 정부, 군사 정권 때 불의한 일에 항거하지 못해 부끄럽다"
그 뒤에 다른 자리에서도 비슷한 말씀.
"도산 선생님 장례식 때 앞장서지 못하고, 먼발치 골목길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마치 젖은 짚단 태우듯 연기만 피우며 살았어요”
그해 9월, 잡지 <샘터>에 소설가 최인호 씨가 연재해온 '가족'이 300회를 맞았을 때 저녁 축하 모임을 한 적이 있다. 피 선생님, 생전의 정채봉 작가, 최인호 작가 등 샘터의 오랜 필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금아 선생님은 그때도 유쾌하고 즐겁게 유머를 즐기셨다. 선생님 발언 차례가 오자
"나는 최인호 씨를 사랑하고 또 미워합니다. 최인호 씨는 참 재주 있고, 글을 잘 씁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여인들이 최인호 씨를 만나면 나 보다 그이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는 최인호 씨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또한, 미워합니다"
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듬해 정월 우리는 선생님께 세배 겸 인터뷰를 하러 댁으로 찾아갔다. 쇼팽을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루빈슈타인의 녹터언 CD를 선물로 드렸더니 선생님은 답례로 '김일중 선생 내외 청람'이라 직접 쓰셔서 수필집 <인연>을 내게 주셨다.
선생님은 알려진 것 처럼 아주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셨다. 그분의 아파트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다. 그림, 사진은 모두 바닥에 내려와 있다. 왜 벽에 못을 쳐 아프게 하고, 이웃을 시끄럽게 하느냐는 것..
피 선생님은 가식이 없고 허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인 진정한 멋쟁이셨다.
태어난 달, 그가 가장 사랑하는 5월을 택해 하늘나라로 가신 금아, 어쩌면 발인날이 그분의 아흔여덟 번째 맞는 생일날인지... 선생님 수필집에서 한 대목 가져왔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선생님, 천국에 가시거든 어려서 잃은 어머니 다시 만나시고 그 품에서 영원히 '거문고 타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맑게 사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