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백석 시인의 싯귀를 볼 때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떠오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도 생각난다. 불가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길로 '버리고, 비우고, 덜 가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평생 물레와 안경 하나를 가졌고, 성철 스님은 열반 길에 누더기 장삼 한 벌 남겼다.
취직하고 아버지께
"이제 우리 집도 돈을 좀 모아야겠어요" 했더니
"선비 집안에 돈 들어오면 글 읽는 소리가 끊기는 거여" 하셨다.
20대를 대처에서 서점 경영, 출판사 직원으로 떠돌다 나이 서른에 농사 짓겠다 고향에 들어가 이듬해 장가를 가셨다. 우리 형제를 낳고 도저히 살림이 나아지지 않자 금융회사에 취직하셨던 아버지, 30년을 은행권에 계셨고, 은퇴 전 3년 동안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억의 대출 승인을 결재하셨던 분이다. 충청도가 고향이고, 평생을 충청도에서 사신 아버지 덕에 우리는 아버지 직장 지점을 따라 구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니며 살았다. 요즘 '떴다'하는 천안에서만 아버지는 7년을 지점장으로 일하셨고, 수 백억 짜리 토지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이재에 대한 안목도 있던 분이 땅 한 평 사지 않고, 내내 관사 생활만 하셨다.
그 곁에 우리 어머니, 운전면허를 따고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점포장을 하시고, 우리가 모두 취직을 하고 난 뒤에도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하거나 분식집 설거지를 하러 다니셨다.
"죽으면 썩을 육신 아끼면 뭐해. 나 다니는 집 사람들 네가 방송국 다니는 줄 알고, 네 동생들 고등학교 선생인 것도 안다. 없어서 이리 한대도 서러울 것 없지만, 건강해서 일 하는 건데 뭐가 부끄럽니?"
IMF 경제위기 때 명퇴하신 아버지는 근 1년 집에서 글씨를 쓰거나 산에 다니며 소일 하시고 가끔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로 의관을 정제, 외출하셨다. 그러다 과거를 감춘 이력서를 쓰시고는 3년 전부터 집 근처 아파트 경비원 일을 하셨다. 명절에 대전에 내려가면 아버지 계시는 곳부터 들르곤 하였는데 감청색 점퍼에 완장을 차고, 노란 색실로 테두리를 두른 모자를 쓰신 모습을 뵐 때 마다 속이 안 좋았다.
"집에 있기 갑갑하다"시며 "건강해서 할 일이 있으니 이 또한 홍복이라"하셨는데 엊그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만 나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한다. 신사(辛巳)년 뱀띠, 높은 연세가 아닌데... 답답해서 어찌 하실 것인가?
내 나이 열 셋, 공주 살다가 대전에 집을 사서 이사했는데 유천동 금하방직 건너편 동네였다. 그때 돈 천이백오십만원, 천장 높은 집에 살게 되었다며 좋아하신 어머니, 앞마당에 개를 키울 수 있어서 즐거웠던 우리 형제들. 거기에 나무 심고 박도 심고, 토끼를 길렀는데...
딱 1년 살다 홍성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한 뒤로도 천안 등지를 전전하다 임원으로 승진하시어 15년 만에 다시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낡을 만큼 낡고, 궁벽한 나머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별반 달라진 게 없이 남루한 그 동네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고 하셨다. 머리가 큰 우리 형제들은 새로 개발된 둔산 쪽이나 같은 동네라도 아파트가 어떻겠느냐 하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한사코
"집이 커 무엇하며, 아파트 보다는 흙 밟고 사는 게 편하다. 너희 넷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장만한 집다운 집인데.. 1년 살고 남한테 세만 주었으니 아깝지 않니?" 하시며 동네 미장이 아저씨에게 부탁해 낡은 데만 손을 보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겨우 서너 차례 집에 내려간다. 그 때 마다 확확 변해가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내 삶이 끝날 때 양친의 반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조간에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 다시 묶여 나온다는 기사가 실렸길래 가난하고 높되 외롭거나 쓸쓸하지만은 않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200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