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
어제 3차(종심)로 박사학위 논문 심사 절차가 모두 끝났다. 인쇄본 맡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타와 비문을 바로잡고, 편집을 정돈하려고 늦은 밤, 다시 나주 사원아파트로 내려왔다. 오늘 아침 일어나려는데 등이 매트리스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하루 밤 사이에) 온몸이 얻어맞은 듯 쑤시고, 결리고, 목 디스크 통증이 올라왔으며 편두통에 눈은 뻑뻑하고, 가렵고, 콧물, 재채기, 코 옆엔 뾰루지까지 생겼다. 그동안 아무 소리 못하다가 이 인간 이제 일이 좀 마무리되었구나 싶은 걸 몸이 알아채고는 주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듯.... 원금 손실을 보전하라!
어제오늘 휴가를 낸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간신히 일어나 라디오를 켰더니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이 소개되고 있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마지막 작품인데 모두 7악장, 45분 정도 길이를 '끊지 말고 이어서' 연주하라고 작곡가가 특별히 지시를 해두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말년에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어떻게 곡을 썼을까?
1차 논문 심사를 앞두고 한참 원고에 빠져 살던 5월 11일 오후, 사무실에 있는데 '안녕하세요 김일중 PD님'으로 시작하는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PD님? 누구지? 발신지는 미국 시애틀. 보낸 이는 구글링을 해서 내 이메일 주소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 삼촌의 부고를 전했다. 쓸쓸한 빈소 풍경과 영정 사진을 첨부한 간결한 이메일.... 암이 너무 늦게 발견돼 손 쓸 사이 없이 5월 1일 세상을 이별했고, 화장하여 경기도 북부 어느 야산 어머니 묘소 곁에 모셨노라고, 그래도 나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이메일 보낸다고, 그는 적었다.
전영화 프로듀서, 신입사원 시절 국장으로 모셨던 나의 선생님.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인의 선후배 PD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이미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서 조문도 못하고, 고인의 유지에 따라 봉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서 묘소에 참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혼자 슬퍼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몇몇 가까웠던 선배 PD들과 정말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추모의 마음을 나눈 그날 저녁 많이 슬펐다.
고인은 EBS, MBC, 대교방송, JTV 전주방송에서 일하였고, <인간시대>, <명작의 무대> '고은', '중광', '임응식' 편, <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 시리즈 등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주목할 만한 TV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유능한 프로듀서였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1997년 전주에 새로 생긴 민영방송에서 나는 신입사원으로, 그분은 편성제작국장으로 타향살이를 시작한 인연인데, 유독 나를 많이 아끼셨다. 아마도 내가 그분의 마지막 AD였을 것이다. 짧지만 촬영, 편집을 함께 했으니까...
국장님과의 일화는 무궁무진하지만, PD로서 그분은 탁월하고, 정확했으며, 무엇보다 멋을 아는 프로페셔널이었다.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가편집 함께 보고, 혼나고, 방송 나가면 곧바로 전화 오고...ㅠ)
20대 후반의 신입사원. 팔팔한 에너지만 있을 뿐, 백지상태와 같았던 내가 그런 분을 만났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말을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받은 사랑의 힘으로 나는 지금까지 기죽지 않고 살아왔다. 왜? 전영화 프로듀서에게 배웠으니까...
IMF 외환위기를 맞아 회사가 어려워지고, 세상과의 불화로 힘드셨을 때, 하루는 나를 집으로 불러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마침 듣고 있던 CD(당신이 가장 아끼는)를 건네셨다. "너도 살다 보면 슬픈 날이 있을 거다. 그때 들어" 그날 받은 디스크가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과 9번이다. 탈리히 현악사중주단 연주. 서양 고전음악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 필립스, 데카 정도 알았던 나는 Caliope라는 레이블을 그때 처음 봤다. PD 되기 전에 이분이 이대 앞 음악감상실에서 클래식을 소개하는 DJ였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45분을 '쉼 없이 연주하라'... 고 베토벤은 왜 지시했을까? 그리고, 국장님은 나에게 왜 이 음악을 주셨을까? 쉰 살이 되어 신입사원 시절 국장이었던 그분보다 나이가 많아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슬퍼도, 기뻐도, 아파도,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단절되지 않는다. 뭔가 큰 구비, 변곡점 같은 게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지나가 보면 알게 되는 것.... 어디까지 1악장이고, 여기서 쉬고, 다시 2악장 시작하고... 매일매일의 삶은 그렇게 매듭지어지기보다는 계속 이어진다는 것 아닐까? 가족이 세상을 떠난 날에도 배는 고프고, 밥때가 찾아오는 것처럼. 그러니 keep going! 꾸역꾸역.
논문이 통과하고, 박사 학위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분명 삶에서 기념할 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일을 해야 하고, 당장 미뤄둔 화장실 청소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같은 소소하고 지겨운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사람은 '연결된 힘'으로 살아간다. 그게 아마도 '인연'이겠지. (벌써) 20년 전.. 홍경수(전 KBS PD,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선배와의 인연으로 한 챕터 쓰게 된 <PD, Who & How>에 나는 존경하는 선배 PD 세 분에 대해서 썼다. 전영화, 한긍수, 주철환...
이제 모두 환갑, 진갑 다 지난 원로들인데 그동안 먹고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 한 번 못하다가 그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머지 두 분과 아주 오랜만에 통화하였다. 잘 지내니? 아이는? 대학에 갔다고? 세월이 그렇게 되었구나, 나는 은퇴했고, 우리 아들 결혼했다. 너 몰랐지? 그렇게 다시 연결된 한 분은 한참 힘들고 바쁜 5월, 6월 매주 두 번씩 당신이 신문에 쓴 칼럼을 꼭 보내주시며 힘내라고 응원하셨다. 참 감사하다.
6월 18일, 금요일. 오늘은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 49일 되는 날이다. 사십구재 개념을 잘 모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야 이렇게 추모의 마음을 찬찬히 정리한다. 오늘 아침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이 나왔고, 어제 논문 심사가 끝났으며, 마침 휴가라 집에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냥 우연인가? 사는 일은 알 수 없고, 그래서 신비롭다.
전영화 국장님, 하늘의 별이 되셨으니 이제 평안하고, 자유로우시기를 빕니다.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게 주신 사랑은 하루하루 후배들에게 갚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