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신분 일 때 소아 치과에 실습을 나가면서 아이들에게 뽀통령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 지 알게 되었다.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온 아이들 얼굴에는 이미 울음이 한가득인데 화면에서 뽀로로만 나오면 진료실엔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 자연스레 주인공 고글 쓴 애가 뽀로로고 악어 같이 생긴 애는 크롱이라는 이름이고 뭐 이런 걸 알게 되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면 각종 캐릭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캐릭터들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영혼의 동반자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는 요란하고 자극적인 듯 보이거나 끊임없는 소비를 유발할 것 같은 캐릭터들을 아이에게 너무 일찍부터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정확하고 필요한 어휘들을 잘 가꾸어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을 단어들은 더더구나 말이 트이기 전엔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의 명칭을 알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 그 단어를 활용할 능력이 커지기 때문에, 단어 인지는 그 이상의 엄청난 함의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입육아 다섯 번째 방법은 일반 명사로 말하기이다. 뽀로로는 고글을 쓴 펭귄이라고 말해주었고, 크롱은 악어, 나머지 주인공들은 북극곰, 여우, 비버, 참새, 펭귄 등으로 불렀다. 학생 때 알게 된 뽀로로와 크롱 외에 다른 주인공들 이름은 실제로 지금도 잘 모르기도 하고 그 덕에 일반 명사로 부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뽀로로와 크롱은 내가 이미 알고 입에 붙은 이름이어서 바꿔 부르는 게 나도 매번 매끄럽진 않았다. 분명 이름이 의식 구조를 많은 부분 지배하는 게 맞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또 유명한 캐릭터인 핑크퐁도 분홍색 여우라고 불렀다. 롯데월드에 갔을 때는 암컷 너구리와 수컷 너구리라고 불렀다. 애버랜드가 아니라 놀이동산이나 테마파크라고 말했다.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기고 하고 뭘 그렇게 까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버랜드가 아니라 놀이동산이라는 단어를 익히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책을 읽을 때도 이해가 바로 되고 일상 대화를 알아듣는 범위도 늘어난다. 매번 그렇게 하는 게 어색할 순 있지만 적어도 처음 말을 배우는 신생아에서 돌쟁이, 말문이 아직 터지기 전 아이에게는 의식적으로 그리 했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시기의 아이에게 정제된 것을 알려 주고 싶었고,어차피 어휘가 많이 늘어난 36개월 이후에는 뽀로로나 크롱 같은 고유명사로 불러도 인지나 활동에 큰 영향이 없고 또래와의 놀이에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문단에 덧붙이고 싶은 시가 하나 있다.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사물들은 불리는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길게는 어휘 습득 시기뿐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좋은 언어로 좋은 세상을 그려주고 싶은 엄마의 과잉 의욕이 담긴 입육아일 수 있지만(물론 캐릭터가 나쁘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아이들도 결국에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