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레오네의 수필집 #022
지방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학생이 되면 타 지역으로 가게 된다. 나도 내가 살던 곳의 작은 국립대를 가지 않았으니, 불가피하게 이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할 시기가 왔던 것이다. 마음 한편이 허전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모님과 떨어져 보다 자유로워질 것만 같아서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그게 독립의 시작이며 다신 본가에서 살 수 없게 된 순간인지 깨닫지 못했다.
입학결정이 늦게 나서 좋은 기숙사에 가지는 못했다. 2층 침대가 2개 있는 4인실이었다. 다행히 일찍 입주하게 되어 1층을 차지할 수 있었다. 보통 같은 전공의 동기들과 방 배정을 해주는 것 같았는데, 나는 늦게 들어간 탓인지 네 명이 모두 전공이 달랐다. 음악교육과, 체육교육과, 산업디자인과, 그리고 나 컴퓨터공학과. 그래도 룸메라는 친구들과 큰 트러블이 있진 않았다. 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말이다. 1학년 수업 중 유일한 프로그래밍 수업이었던 C언어를 배우면서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과제를 내주면 그날 밤에 기숙사에서 노트북으로 정말 열심히도 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빠르게 과제를 제출했고, 그 모습을 좋게 봐주신 어느 교수님이 같이 공부할 생각 있냐며 학부연구생 제안을 주셨다. 그렇게 나는 1학년 1학기에 어느 랩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게 내 모든 대학생활과 인생을 바꿔놓을 선택이 된 것일 줄은 몰랐다.
기숙사 생활은 외로움으로 시작했다. 연고도 지인도 없는 낯선 지역이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항상 어디서든 나를 소개하고 증명해야 했다. 말할 사람조차 없었기에, 이 외로움을 달래기에 동아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동아리 사람들의 적극적인 관심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타지 생활에 잘 적응해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당시 나를 환대해 주던 동아리 선배들이란 사람들에겐 감사함을 느낀다.
1학기가 끝나고 다시 2학기가 시작할 즈음,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치고 말았다. 물론 2차 신청기간이 있긴 했지만, 자취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 적극적이진 않았다. 부모님은 기숙사에 들어가기를 -당연하게도- 원했지만 결국 자취를 하게 되었다. 처음 구해보는 자취방이라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설도 괜찮았고 좁지도 않았지만, 창문 바로 앞에 다른 건물이 있어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일 년 지내보니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게 큰 문제인 것을 깨달았다. 밤낮 구분이 되지 않고 인공조명으로 종일을 지내야 하니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자취방을 구할 때면, 햇빛이 드는지를 꼭 보기로 했다. 원래 반수를 하고 싶어서 고삼 때 공부하던 책들을 몇 권 들고 가긴 했지만, 한 번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사실 반수를 하고 싶다고 교수님에게 말하자, 인생에 전혀 쓸모없는 공부가 수능공부나 공무원 공부다-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나를 말렸다. 그래서 반수에 대한 욕심도 많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새내기 시절이 끝나고 2학년이 되었고, 신입생이란 친구들도 많이 들어왔다. 8월에 입대하기로 신청해 두었으니 그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놀기로 작성했던 시기였다. 적당히 학점만 챙기고서 술만 진탕 먹다가 끝이 난 것만 같다.
그다음 내가 살던 곳은 다름 아닌 군부대였다. 훈련소를 제외하고 내가 20개월간 몸담았던 곳은 경기도 파주 조리읍에 위치한, 백마부대로 유명한 9사단 28 연대 1대대였다. 한창 군인권에 관심도 높아지고 월급도 오른다는 이야기가 들릴 무렵이라, 그에 준하게 군부대시설도 많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하필 또 내가 있던 곳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대다수의 군부대에서 개인침대를 사용했었는데 여기는 여전히 침상을 쓰고 있었다. 유튜버 장삐쭈의 '신병'에서 그려진 생활관 모습도, 나보다 더 이른 시기였지만 침대였다. 그만큼 낙후된 시설이었다. 1미터 남짓한 관물대와 그 앞 1.5미터 정도의 침상에 누워 20개월을 보냈다. 개인공간 따위 하나도 없었다. 침상은 각자의 자리만 있을 뿐 공용공간과 다를 바 없었다. 원룸만 한 생활관에서 11명의 동기들과 함께 지내왔고 나름의 전우애도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있던 중대는 거의 100명 남짓한 규모였는데, 샤워실에 샤워기는 12개 정도였고 그중에서 고장 난 몇 개를 제외하면 샤워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세탁기는 2대였고 건조기가 1대 있었다. 세탁기가 부족하다 보니 거의 24시간 내내 세탁기를 가동했고 과로사로 터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침상이 좋았던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온돌 시스템이라 겨울에 절대 춥지 않고 오히려 더울 지경이란 점인데, 그래서 한겨울에 매트리스 아래에 소시지를 넣어두면 따끈하게 잘 익어 야식으로 몰래 먹기 좋은 상태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추억은 부대 안에서 몰래 맥주를 마셨던 것이다. 외박이나 휴가를 다녀온 사람에게 맥주를 구해달라고 한 다음, 복귀 시점에 맞추어 개구멍을 통해 맥주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해가 지는 겨울철에만 가능했고 당직사관과 당직사령 모두 열정적이지 않은 사람이어야만 가능했다. 맥주는 들키지 않게 드라이버로 천장을 열어서 보관했으며, 추운 겨울날 창문 밖에 두면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짬이 어느 정도 차고 나서 두어 번 마실 수 있었는데, 취하진 못했더라도 고된 군생활 동안의 맥주 한 잔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물론 걸리면 중징계이기에 어느 정도의 스릴감도 그 맛에 더해진 것은 사실이다.
상병이 될 무렵부터 슬슬 군생활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했다. 군생활의 어떤 목표가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고, 그저 무료해진 군생활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사지방과 걸그룹 뮤직비디오조차 질릴 무렵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책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면 철로 만든 작은 컵에 커피 카누를 하나 타서는, 로아커 초콜릿과 함께 노트를 펴고 소설을 쓰곤 했다. 그렇게 전역까지 무려 대여섯 편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고, 전역 후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그때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 현재 두 권의 책이 되었고, 나를 작가로 만들어 주었으며, 취업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