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레오네의 수필집 #027
만 스물네 살, 직장인이 되고 나서 나는 내 월급에 과분함을 느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몇 십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텨내던 대학생이 갑작스럽게 수 배가 넘는 돈이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생긴 이유 탓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과분함은 자연스레 나눠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내가 처음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찾은 곳은, 어플 당근의 동네 커뮤니티였다. 그곳에 코딩 과외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글을 올렸고, 역시나 예상대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 과외를 받고 싶다는 메시지가 왔다. 나름 내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는 하는구나-라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본인이 조울증이 있는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듣고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장애나 정신증상에 대한 편견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지만, 막상 조울증을 겪는 사람과 대화해 보거나 마주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증상이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조울증에 대해 찾아도 보고 고민도 하며 하루를 보낸 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내 첫 나눔은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또 기회란 것이 찾아왔다. 많은 기업이 그러하듯, 내가 속한 회사도 사회공헌 활동을 하곤 하는데, 그 일환으로 인근 고등학생들이 우리 회사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임직원 멘토로 선정되었고 우리 회사를 방문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멘토링 따위를 해줄 기회도 얻게 되었다. 사실 길지 않은 시간이라 크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지만,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던지는 그 순수한 질문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후 사회공헌 활동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저소득층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멘토링 활동으로 이어졌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봉사는 참 고민이 많았다. 총 8회에 걸쳐 격주마다 한 시간씩 진행되는 온라인 멘토링 프로그램이었고, 나는 그래도 내가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코딩을 주제로 정했다. 중학생이란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학생들이 많은 지식을 얻기보다 경험을 확장하고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며칠 간 고민을 했다. 또한 어디까지나 강제성이 없는 활동이었기에 학생들이 꾸준히 흥미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난이도를 적당히 조절하고 어려워서 못 따라오는 경우가 없도록 주변 현직 교사들의 조언까지 구해가며 커리큘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생각한 수준과 학생들이 체감하는 수준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회차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어려워서 따라오기 힘든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숙제는 점점 하지 않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점점 교육봉사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웠고, 갈수록 억지로 하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의 뿌듯함 내지는 성취감을 얻고 싶었고, 나로서는 사실 그 감정을 느끼는 것이 봉사활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였다. 하지만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않자, 오히려 허탈감과 무력감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물론 중간에 그만둘 수 없었기도 하지만- 이 또한 봉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들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 위안 삼으며 조금은 감내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렇게 다음 과정은 조금 더 재밌게 해 보려는 생각으로 주제를 바꾸고 커리큘럼도 바꾸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같은 상황은 반복되었다. 나는 그렇게 2년 이어오던 교육봉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내면 어딘가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인지 몰라도, 지금은 또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멘토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역사회 문제를 IT 기술로 해결해 보려는 프로젝트였고, 그중 선발된 팀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프로토타입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역할이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쟁하여 선발된 팀은 미국과 영국 팀이었고, 이들은 회사와 멘토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다가오는 하계 올림픽에서 본인들이 제안한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을 전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고 한다. 왜 결국 또 미국과 영국이었을까-하는 의문은 있지만, 아무튼 적극적인 학생들의 모습에 나 또한 더욱 열심히 도와주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봉사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지방에서 나고 자란 탓일까. 수도권에 올라와보니 -당연하게도- 지방과 교육, 인프라가 차이나는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보고 듣는 환경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와 같은 초중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대게 공무원이셨고, 가끔 자영업을 하는 분들이 계실 뿐이었다. 교수나 의사 따위의 전문직 부모를 둔 친구도 있었지만 매우 적은 비율이었다. 학원이나 과외를 받고 싶어도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고, 인근 대학교가 나름 국립대였지만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들을 수 있는 조언이나 정보도 제한적이었고 이런 환경이 개인의 시야와 그릇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스테디셀러 "총균쇠"에서 지리적 환경차이가 문명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듯, "아비투스"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에 따라 품위, 태도, 시야 등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듯. 성장 환경의 차이가 인생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체감한 탓일 수도 있겠다.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제한된 환경에 놓인 학생들이 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통로와 같은 역할이 되고 싶었던 것만 같다. 얼마 전 회사 사회공헌 조직에서 일 년 간의 나눔 활동을 마무리하는 행사에 초대받았다. 나름대로 교육 봉사를 꾸준히 한 덕분일 것이다. 이런 행사가 늘 그러하듯 우수봉사자를 선정해 시상을 하였는데, 어느 수상자가 발표한 소감이 참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본인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본인에게 문제집을 나눠주던 영어선생님, 50원 100원을 한 두 푼 모아 저금하던 것을 기특하게 여겨 저축왕 상을 받을 수 있게 해 준 마을 어른들, 그런 분들 덕분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꿀 수 있었고 지금 회사에 취업 합격 전화를 받고 나서 그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그 고마운 마음을 아직도 잊지 않고 일 년 월급의 두 달치는 기부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한 줌의 과장도 없었고 전혀 형식적이지도 않았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그 소감은 행사장에 있던 많은 사람의 공감을 자아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봉사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나누는 행위는 사소하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왔고 믿고 싶다. 내가 하는 모든 봉사에서 그런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란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수십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주다 보면, 그중 단 한 명이라도 나를 통해 생각이 확장되기를 바란 것 같다. 그게 현실이 될지, 가능한 일인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내 노력이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여전히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주고, 그 사람에게 오래도록 기억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나도 누군가의 기억에, 그런 사람으로 흐릿하게 간직될 수 있기를 여전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