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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Jun 12. 2019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기생충의 생존 전략

영화, <기생충>2019.6.8

몇 년 전에 읽었던  <<하리하라, 미드에서 과학을 보다>>라는 책에서 기생충에 관한 내용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기생충은 다른 생물 몸속에 붙어 영양분을 빨아먹고, 언제나 구충제 한 알이면 씨를 말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책에서 은 대로라면, 기생충은 생존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렇다.


1. 소화액에 의해 소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몸의  표면을 보호제로 코팅한다. 숙주(기생충이 빌붙어 사는 생물,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의 면역 세포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하는 기술을 발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2. 숙주와의 관계는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숙주의 영양분을  모조리 빼앗아 먹으면 당장은 배부르지만,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주에게서 빼앗아도 괜찮을 정도의 양만 가로채는 중용의 도를 유지해야 한다.

  

3. 주는 기생충의 에너지 공급원이자, 거주 공간이며, 환경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숙주가 아무리 구박해도 무조건 달라붙어야 한다. 끊임없이 공격해 오지만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생충도 변해야 살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간충이라는 기생충은 유충일 때는 곤충의 몸속에 살다가 성충이 되기 위해서는 새의 몸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충이 될 시기가 다가오면 곤충의 뇌 속으로 이동하여 곤충을 좀비로 만든다. 그런 다음 곤충의 뇌를 조종해 풀잎 제일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새에게 잡아먹히도록 한다. 새가 곤충을 잡아먹으면 다시 새의 몸속으로 들어가 성충으로 변해 기생하게 된다. 기생충 이야기라고 하기에 너무 섬뜩하고 이기적이지 않은가.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제목이 왜 기생충일까, 기생충이라고 짐작되는 가난한 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숙주로 삼으며 기생하려고 할까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제작 의도는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을 생각해 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감독의 의도나 작품의 다양한 의미를 깊이 생각할 여력이 내게 없기 때문에, 나는 기생충의 습성을 바탕으로 캐릭터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려 한다.


4명의 가족 구성원들 모두 변변한 벌이가 없어 빈곤한 생활로 지쳐갈 즈음,  아들 기우가 친구를 통해  숙주 하나를 알게 된다. 바로 박사장네다. 기우는 다혜의 과외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무난하게  안착한다. 그다음  여동생 기정이 다송의 미술 선생님으로 숙주를 차지하게 된다. 다음은 아버지 기택이 박사장의 운전기사로, 엄마 충숙은 가사도우미로 자리 잡으면서 각자의 영역을 잘 찾아간다.


이들은 반지하에서 남루한 행색을 하고 살아왔지만, 숙주의 공간에 머물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는 건 기본이고, 지적 허영과 교양이라는 보호제를 듬뿍 발라 코팅한다.


숙주의 사적 공간에 함께 머무는 동안, 숙주의 불편한 언행도 잘 참아내야 한다. 선 넘는 것을 싫어한다는 박사장의 건조한 말투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다송이의 행동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수시로 코를 막으며 냄새난다고 핀잔을 주어도 아무리 부려먹고 무시해도 잘 붙어 있어야 살 수 있다.


기택 일가족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기생하고 있는 동안, 원조 기생충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문광 부부가 등장한다. 기생하기 딱 좋은 최적의 환경을 자랑하는 지하실 비밀 공간, 그곳에 숨어 살아온 문광의 남편. 몇 년 동안 매일같이 숙주에게서 영양분을 빨아먹어도 숙주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균형을 이룬다.  


영화는 숙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기생충들의 충돌반전으로 보여준다. 숙주가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숙주는 좀체 자신의 몸에 기생충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기생충들의 싸움에서 문광이 숙주 자리를 탈환하는가 싶었지만, 국 기택 일가족이 문광 부부를 제압하고 그 과정에서 문광이 죽음을 맞게 된다.


기택의 반지하 집이 홍수에 잠겨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된 상황에서도 숙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기생충들이다. 하지만 기우는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문광의 남편 근세를  없애려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근세의 행동으로 비밀리에 이뤄지던 공생 관계가 산산조각이 다. 뒤늦게 자신의 몸에 기생충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숙주. 그들이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는 너무나 뻔하다. 단 한 알이면 말끔히 사라지는 강력한 구충제 한 알을 준비하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 중에,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말과  되물림이라는 말 등은 듣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가난을 한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영화에서 기생충처럼 그려진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보면, 각자 재능이 있으니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지만, 행복 지수로 비교하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열악한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경제적 여유가 가족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현대인의 모습보다 더 인간적이다.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파티를  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행동. 자기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이었지만, 그들 마음속에 부자들이 하는 것처럼 누려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가난한 그들에게도 누리며 즐길 수 있는 마음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생활하는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평행선처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존재와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들에 대하여, 오늘은 오랫동안 생각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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