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 딸아이가 교환학생 자격으로 페루로 떠났다. 그 무렵 한국은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는 추세였다. 페루는 우리와 반대편이라 확진자가 없었기 때문에, 코로나 위험 소굴을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페루는 코로나 청정지역인 줄만 알았다.
딸은 페루에 도착해서 담당 교수님이 학교와 시내 구석구석 안내도 해 주고, 개강까지 얼마간 여유로운 시간을 활용해 같은 기숙사 친구들과 박물관, 바닷가도 갔다며 들떠있었다. 리마 시내 풍경 사진과, 페루의 파도소리가 담긴 영상을 보내줘서 잠시나마 나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다 3월 중순부터 페루에서도 확진자가 급증했고, 급기야 3월 12일부터 페루 전 국민들에게 강제 격리 시행령이 떨어졌다. 식료품과 약을 구입할 때 빼곤 기숙사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된 것이다. 외출 금지와 통금 시간을 어길 시 무장 군인한테 강제 압송된다고 했다. 국경 봉쇄와 더불어 사회 분위기가 살벌해서 걱정스러운 한편, 강력한 조치를 취하니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잦아들거라 기대했었다.
2020.4.25일 기준
하지만 사태는 더 심각해져 갔다. 4월 25일 기준으로 페루 확진자는 21,634명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페루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중남미 쪽에서는 의료서비스 시스템이 좋지 않아 실제로 치료받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길거리에 쓰러져 죽은 시체 소식도 있고, 저소득층 사람들의 경제 활동을 막을 수 없어, 강력한 조치에도 확진자는 더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만연했다. 저런 상황에서 딸이 코로나에 감염되면, 자국민도 아닌데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딸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지난 3월 26일 페루의 국경 봉쇄로 발이 묶인 한국 여행객들을 정부에서 데려올 때, 그때 들어왔더라면 좋았을 걸. 지금 생각하니 후회되지만 그때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7월 말까지는 한참 남았고, 학교가 곧 개학할 것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우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딸은 기숙사 동기들과 각국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게임도 하고, 시간 정해서 운동도 하고, 사이버 강의도 들으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페루도 한국처럼 개학이 몇 차례 더 연기되더니, 어제는 최종적으로 오프라인 개학을 하지 않고, 올 한 해 모든 과정은 사이버 강의만 진행할 거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한국에서도 수강할 수 있으니,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연락이 왔다.
강의실은 구경도 못하고 사진으로만 남겨 둔 리마대학교 교정.
"엄마, 난 왜 이리 운이 없는 거야!"
하며 절망하던 딸에게
"세상 일은 예기치 못한 일 투성이지. 건강하기만 하면 기회는 또 올 거야."
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늘어놓았다.
차라리 잘 됐다 싶어 빨리 돌아오라고 했더니, 가장 빠른 시기는 국경 봉쇄 기간이 풀리는 5월 10일 이후가 될 것이며, 직항이 없는 관계로 비행기표 구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앞으로 적어도 2~3주는 더 격리된 채 지내야 하고, 한국 돌아와서도 자가격리 2주는 더해야 하니, 딸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버텨야 할지 불 보듯 뻔하다.
꿈을 안고 떠난 청춘들이 코로나 감옥에 갇혀 지내다, 묵묵히 수감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 같다. 교정을 제대로 밟아보는 일도, 떠나기 전부터 꼭 가보고 싶다던 마추픽추와 우유니 소금사막을 지척에 두고도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딸아이 숙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리마의 밤풍경.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이 야위어졌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잠시나마 소중한 경험과 수많은 상념들이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이 또한 딸이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친구 생일에 한인마트에서 즉석 식품으로 장만한 떡볶이와 미역국/ 그 사이 지진도 한 번 났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그날까지 부디 무사히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딸아이처럼 같은 시기에 해외 교환학생으로 떠난 모든 사람들에게도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