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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은 반댈세!

딸이 결혼하고 싶다기에

by 라향

<키 180m에 크로스핏과 달리기로 다져진 건장한 몸. 서른 중반의 8년 차 회사원, 부산 사투리를 쓰는 남자. 그의 생김새는 양볼에 살짝씩 들어가는 볼우물과 눈웃음이 인상적이다. 성격은 매사에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고 특별히 모난데 없이 평범하다. 작년에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남동생은 부산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고, 그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900일째 딸(29살)이 교제하고 있는 남자친구에 대한 정보다.


딸은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을 했기 때문에, 본인도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도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진작 결혼하고 싶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는데, 소개도 안 시켜주고 미적대기에 하도 답답해서 어떤 사람인지 보기나 하자고 졸랐다. 그래서 드디어 어제 첫 대면을 했다.


그를 만나기 전 내가 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은 이랬다.


ㅡ나이 차가 좀 많이 난다 싶었다.(6년) 그래도 뭐 서로 죽도록 사랑한다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으니 패스!


ㅡ건강문제는 생각지도 았았는데, 언젠가 통풍이 한번 온 적 있다고 들은 것 같다. 그래, 그 이후로 문제없었고 평소 운동을 좋아하니까 관리만 잘하면 되겠지. 이것도 딸이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일단 패스!


ㅡ경제적인 문제는 딸한테 대충 들어서 형편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이 부분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지만, 딸이 그것까지도 둘이 헤쳐나가겠으니 제발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고 난리 치면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나. 사람 일은 모르지 않은가. 지금 가난하다고 앞으로 잘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이 세상 가난한 청춘들은 결혼도 하지 말라는 건가? 너무 돈으로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지. 비전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아! 이건 패스를 쉽게 못 하겠다!


ㅡ딸이 연애 초반에 술 취해서 내게 울며 하소연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똑같이 그가 자기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헤어지라고 해도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최근까지도 궁금했다. 과연 그가 우리 딸을 진심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느낌으로는 딸이 그를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건 가장 기본이자 가장 충실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두둥! 그를 만났다.


식당 룸에서 보면 분위기가 너무 어색할까 봐, 홀에 있는 자리로 예약을 해뒀다. 예상대로 덜 어색하고 좀 편안했다. 술을 따라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딸 입장 생각해서 자연스럽고 가벼운 분위기로 이끌어갔다. 술이 이럴 때도 참 고맙다.


나도 내숭 떠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ㅡ딸의 어떤 점이 좋아?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망설이더니, 외모가 맘에 든다고 했다. 또 자기가 표현력이 부족한데 리액션을 잘해줘서 좋다고 했다.


ㅡ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해?

그는 원래 법학 전공자이지만 지금은 물류회사에 근무 중이라고 했다.


ㅡ나이도 있는데 결혼 생각 안 해봤어?

예전에 집안 형편 때문에 결혼 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딸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만 당장은 결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ㅡ부모님에 대해서도 궁금해.

아버님은 사업을 하시다가 IMF때 부도가 났고, 이후 다시 재개하셨는데 건강 악화로 병원생활 10년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잘 지내고 계신다.

아버지가 혈액투석까지 하셨다니 듣는 내내 마음이 짠했다. 장남이라서 병원비 부담이 컸던 것 같다.


ㅡ친한 친구들 이야기, 좋아하는 음식, 술이야기, 운동이야기 특히 골프 친다기에 골프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화를 할수록 알게 된 것도 많지만,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혼할 처지도 못 된다고 하지, 나이에 비해 꼰대기질이 있고, 과묵한 편이라 알콩달콩 재미있게 연애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여자친구한테 꽃 한 송이 선물하는 것도 크게 관심 없는 것 같았다. 더 오래 앉아있기 싫어졌다. 그래서 1차에서 헤어지고 나만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딸 편으로 편안하고 재미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만나러 가기 전에는 사실 기대를 좀 했다.

형편도 대충 알고 하니, 내 앞에서 당신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지금 형편이 어려워도 앞으로 어떻게든 잘살아보겠습니다. 대충 이런 비슷한 말을 듣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당장 결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론만 간접적으로 내게 전달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돈 벌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며칠 전까지 본인의 생각은 확고하다고 하더니, 그와 만난 후 내 의견을 듣고 나서는 생각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이건 내가 바라던 거다. 왜냐하면 아직 딸 나이가 한창이라 다른 사람들을 더 만나봤으면 좋겠다. 딸은 엄청 유쾌하고 밝은 성격인데, 그와 연애하는 동안 들떠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성격 밝고 재미있는 사람 만나서, 달달한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나랑 헤어지고 나서 둘이 2차에서 대화를 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딸한테 털어놓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원에 오래 계셔서 자기가 모아둔 돈이 없으니, 지금은 결혼 좀 어렵지만 최대한 빨리 결혼 계획을 세워보겠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와서 내 마음은 확고해졌다. 딸이 아무리 좋아해도 결혼은 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도 딸이랑 계속 대화중이다.


ㅡ그 사람이랑 왜 결혼하고 싶어?

외모가 자기 스타일이고, 사투리 쓰는 게 좋다. 감정기복이 없어서 화를 잘 내지 않아서 좋다. 결혼하면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할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ㅡ그럼 어떤 점이 싫어?

본인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서운하고 본인 혼자 삐치게 된다고 한다. 여행이나 데이트 등 돌아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편이라서 재미가 없다. 종종 그 속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딸이 단번에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지만 현명하게 판단해 주길 바란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엄마로서도 말하겠지만, 결혼이라는 길을 먼저 걸어본 인생선배로서 조언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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