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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Jul 31. 2017

미션:친구를 웃게 하라

일상의 메모 No.13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를 관람하고 나서


미션: 친구를 웃게 하라




우연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두 번씩이나 봤다. 덕분에 각기 다른 배우들의 실력도 비교하고, 감동적인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행운도 누렸다. 오늘 또 한 번의 관람 기회가 왔다. 지루할 법도 하지만 원작을 180도 뒤집었다는 말에 매료되어 일단 보기로 결정했다.


‘웃음의 연극술사’라고 불리는 일본 희극 작가 미타니 코키의 작품이다. 작가는 고전 ‘지킬 앤 하이드’를 패러디한 작품을 만들면서 관객들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고 한다. “관객이 감동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마음껏 웃다 떠나라.” 역시 작가의 예상적중했다. 감동은 없지만 예측불허한 헤프닝을 보며 웃다보니. 눈 깜짝할 사이 공연이 끝나버렸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일요일 밤의 ‘개그 콘서트’를 보며 얼마나 깔깔대며 웃었던가, 요즘은 개콘을 봐도 시큰둥하고, 뭐가 됐든 코믹은 너무 유치해서 심드렁한 반응만 보이곤 한다. 나는 아무 느낌이 없는데 옆 사람이 죽어라 웃어대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싫다면서 오늘은 왜 봤냐고? 대전에 사는 친구가 일상을 탈출해서 서울 나들이를 왔다.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맘껏 웃다가 나오는 연극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내 취향이 아니긴 해도 친구가 요청한 만큼, 어느 정도 작품 수준도 있으면서 실컷 웃을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연극을 찾아야 했다. 검색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한 뒤에, 미심쩍은 마음으로 티켓을 예매했다. <술과 눈물과 지킬 앤 하이드> 일단 술과 눈물이라는 낱말이 들어가서 제목은 합격이다.


친구와 나는 웃을 준비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하는 약을 개발한 지킬, 그는 스스로 약을 마셨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하이드 역을 대신 해 줄 배우 빅터를 고용한다. 어라! 이건 뭐가 잘못 돼도 한참 잘 못 된 거 같았다. 배우들의 대사나 행동들이 너무 유치한 나머지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곁눈질로 친구를 슬쩍 쳐다봤더니, 친구도 눈동자의 빛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아이구, 미안해서 어쩐담? 웃자고 온 친구한테 지루함만 안겨줬으니, 이 극단은 사기를 쳐도 너무 치네. 또 이런 수준의 연극을 보고 미친 듯이 웃다 왔다고 말한 블로거들은 뭘까?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던 참에 잠이 확 달아나는 장면이 나왔다. 지킬박사의 약혼녀 이브가 하이드의 대역을 맡은 빅터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정확하게는 하이드한테 빠진 것이다. 평소 지킬박사는 자기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언제나 재미없고 알 수 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는다. 이브는 이런 지킬이 너무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칠고 음란한 말들을 쏟아 내고, 잡아먹을 듯한 야성미를 풍기는 하이드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지킬한테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 하이드를 통해 사랑을 느낀 이브는 지킬만 보면 약을 마시라고 조른다. 이브는 하이드와 함께 있을 때 자기 안에 갇혀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행복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자기 모습을 수치스러워 한다.


어느 날, 이브는 직접 약을 마신다. 이브 역시 지킬과 하이드처럼 하이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사실 그 약은 전혀 약효가 없지만, 이브 스스로 그 약이 효과가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린 것이다. 이브는 고고하고 정숙한 여성, 하이디는 음란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본능에 충실한 여성이다. 웃음의 절정은 바로, 지킬과 하이드, 이브와 하이디가 서로 뒤바뀌면서 이야기는 엉망진창이 되어 가지만, 관객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마음껏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친구도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이야기에 몰입되어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아, 그 순간의 안도감이란, 친구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감동? 당연히 없다. 원작을 패러디한 작품이라는 것도 좋았지만, 얌전하고 수동적인 약혼녀 이브(원작에서는 이름이 엠마)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춰서 신선했다. 웃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연극, 이브의 대사와 행동에  힘이 실렸는지 연극이 끝나고도 자꾸 생각났다. 우리 내면에 반드시 선한 모습만 존재할 수 없다. 때로는 그것이 악이 될지라도 본능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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